송기현의 살림운동
교회와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 쓰기 본문
4세기경에 어거스틴은 답답하기만 한 교회에 화가 나서 “구름이 천둥을 몰고 오듯 주님의 전이 이제 온 세상에 지어질 판인데 이 개구리 떼는 그저 연못에 옹종거리고 모여 개굴개굴하면서 ‘우리만 신자요!’하고 앉아 있으니”라고 썼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4세기 교회를 향한 장탄식은 교회 안팎에서 들려오는 오늘의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와 왜 그리도 닮아 있는지........
오늘의 교회는 온 인류에게 영생과 소망의 빛으로 “바실레이아”를 위한 “에클레시아”로서 그 본질적인 본분과 사명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본분과 사명에서 떠나 있고 오히려 무기력한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저마다 “우리만 택함을 받은 신자요” “우리만 구원받았소” “우리만 들려 올라가야 하고 우리만 천국가야 하오”라고 하면서 자기 독선과 자기 위안에 빠져 있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지나친 열광주의적 신앙인들은 휴거를 말하고 시한부종말론을 외쳐대며 생활 없는 믿음과 신앙만 주장하고 이성 없는 믿음이 최고라고 열을 올리며 찬미하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 없는 신앙은 마치 실명(失明)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고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함정에 빠지는 것과 같이 이성을 잃어버리면 무질서의 세계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을 고양시키고 자부심을 갖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교회로부터의 신앙의 시련이 오는 일이 드물지 않는 현실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는 없는 실정에 있다. 이 세상 속에서 가장 신뢰를 받아야 할 교회가 더욱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제시하는 신관의 하나님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교회와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끈질긴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는 자기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위한 초석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유화된 경건은 게토주의(Ghettoism)를 낳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소욕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에클레시아는 게토화 된 공동체이기보다는 가시적 혹은 불가시적 복음공심체(福音共心體)이며 복음공신체(福音公信體)인 것이다(공동체란 말이 사회적 결속체로서의 의미가 강하여 교회에 적용하면 처음 적용할 때의 의미를 상실하고 구원을 탐하고 믿는 신앙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집단을 이루어 배타와 적대를 일삼고 원수시와 이단시를 서슴지 않는 집단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기독교가 공동체로서 벌여온 일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공동체라는 용어가 교회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한 용어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복음공심체나 복음공신체로 표기하려고 한다. 복음공심체와 복음공신체의 뜻은 복음으로 혹은 복음을 위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믿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운동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정치 종교 사회 경제 등의 종말적 현상을 직시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로 가시화 되어야 할 교회마저도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고 믿음을 같이 하지 못하여 미움과 반목과 갈등으로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고 다툼과 멸시의 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으며 이기적인 집단으로 화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있으며 교회를 향한 마음을 굳게 닫아걸게 하고 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있다는 유대인들의 교회론은 우주적 “에클레시아”의 본질에서 멀어져서 회칠한 무덤(마 23:27)과 사단의 회(계 2:9, 3:9)로까지 변질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주님이 눈으로 보신다고 하면 마찬가지의 모습이 아닐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중과 말씀으로 선포된 교회론”의 부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상실에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재발굴과 재발견을 해야 하며 그의 “에클레시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한국에서 이름만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몇몇 대형교회들이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자신의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문제 때문에 논란이 많이 되고 있다. 어찌 어렵고 힘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직을 물려주는 것이 십자가를 지워주는 것 같아서 자신의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을 세습적이라고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 목사가 피땀 흘려서 개척하여 성장시킨 대형교회를 남들 주기는 아까우니까 자기의 자식에게 대물림해 주는 것이기에 말이 많은 것이다. 이런 세습이야말로 제국적이고 왕권적인 유산이 아니던가? 이러한 가족중심, 혈통 이기주의, 제국적이고 왕권적인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서 “누가 네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니라”하셨다. 여기에는 가족, 혈통 이기주의가 전혀 없다. 주님의 교회가 이런 사유화와 물량화와 이기주의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론의 왜곡과 부재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주님의 교회가 그의 복음의 원리로 복음공심체나 복음공신체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사회적 공동체로서 사회적 원리가 지배하게 될 때 온갖 폐단이 속출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신학이나 교회신학과 성서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하신 구원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을 때가 많았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교로 회귀하고 있으며, 개혁교회라고 하면서도 개혁교회가 오히려 로마카토릭교회로 또 다시 “Calling in”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성전종교화와 회당종교화와 성당종교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카토릭교회는 “베드로 노선의 교회”의 선상에서 교회론을 논하며 혈육 위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와 교황을 연결하여 교회를 절대시하며 왕국적 제국적 인위적 기계적 교리적인 체제를 만들고 동시에 교황의 무오를 주장하는 교회신학에 한 동안 있었다. 이에 대하여 개혁교회는 바울 노선의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바울은 당시 유대 교회로부터의 저항과 12사도 쪽으로부터의 거부 속에서 독자적으로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라는 교회론으로 이방지역에 가시적인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목회를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을 통하지 않고는 이방교회(異邦敎會)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의 개혁교회는 이와 같은 바울 노선의 교회론을 모형으로 하였기 때문에 베드로 노선에 있던 로마카토릭 교회론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중”이나 “그의 복음”으로 세워지는 “바실레이아”를 자라게 하고 이루기 위한 “에클레시아”에 까지는 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처럼 초기교회 운동과 성서교회의 운동에 서 있던 개혁교회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주장하며 성서를 절대시하는 성서신학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구교회는 교회와 성서를 놓고 피차 이단시를 하며 교회신학과 성서신학의 절대성을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교회신학과 성서신학은 적지 않은 출혈과 상처를 입었으며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피차 허탈감에 빠졌다가 근래에 와서 교회신학은 성서신학으로 돌아가며, 성서신학은 교회신학으로 돌아가 서로 보완을 하는 지경에 있어왔다. 그러다가 이제는 사이 좋게 공존을 하고 있다. 이단시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지만 마치 양 교회는 서로 사이 좋게 공존을 하는 것이 교회신학이나 성서신학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는 것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신학이나 성서신학은 역사의 주관은커녕 역사에서 점점 밀려나 한 변두리에 있는 현상에 있으며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 석양처럼 위기를 맞고 있는 처지이다.
아직 교회가 구원한다 하여 모든 교회들이 저마다 다 구원을 하고 있고, 성서가 구원한다 하여 이 성서 저 성서가 다 구원하고 있다. 교회가 구원한다고 하면 아무 교회라도 상관이 없으며 교회라는 이름만 붙어도 되는 것이고(?) 성서가 구원한다면 구태여 신약성서일 필요가 없으며(?) 구약성서로도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하며, 결국 유대교로도 회교로도 구원이 가능하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로마카토릭이나 개혁교회 자체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성서로 돌아가는 교회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교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로 돌아가야 하며 조직체를 구축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운동을 해야 할 때이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사도교회가 손쉽고 구체적인 교회라고 할지라도 모든 교회의 근본과 원점과 본질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욱 중요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리나 율법으로나 구약으로나 주의나 사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교회를 그의 교회 되게 하고 만민을 영원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천 년 동안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 동안 켜켜이 쌓인 퇴적물들을 거두어 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직접 접촉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특히 양적으로는 성장이 둔화되고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교회는 집단이기주의적인 교권주의와 협소한 교파주의를 하루 속히 청산해야 하며 유대의 성전제사와 같은 예배와 성서의 기계적이며 원리주의적인 해석에서 속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기독교는 교회론의 부재에 있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론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하며 회복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 교회나 교단의 잘 훈련된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수가 증가하도록 하는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모습과 일상생활에서 삶의 모습이 일치성과 연속성이 없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신앙은 있지만 그것이 일상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교인을 양산해 내는 것은 제조업의 노동자들이 불량품을 양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성전종교와 같이 예배당에 모여 제사적인 예배만 잘 드리는 교인으로 만족하는 교회보다는 일상의 삶의 양식과 삶의 질을 바꾸어 가는 교인으로 훈련하고 교육하고 고양하는 교회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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