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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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현의 살림신학

선교와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쓰기

유앙겔리온 2006. 12. 29. 17:59

   20세기말의 역사는 지금까지의 2원론적인 모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깨뜨리게 해주었고 해체해주었으며 이러한 일은 더욱 가속도가 붙어서 진행될 것을 예고해주었다. 이제 2천 년대에 진입한 인류는 미래역사가 2원론적인 사고와 왕국적이거나 제국적인 정치나 종교나 사회나 선교가 빛을 잃게 될 것임을 확연하게 예시하고 있으며 예고를 하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2원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이변(異變)이라 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운동이며 복음화이며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첩경이며 정도이며 순리이며 당연지사(當然之事)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는 제국주의사상(帝國主義思想)과 식민주의사상(植民主義思想)과 호전사상(好戰思想)과 전투정신(戰鬪精神)과 살생정신(殺生精神)과 적대의식(敵對意識)과 원수 맺는 일이 없으며 정복이 없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선교는 주로 원수 마귀와 싸우듯 하여왔다. 그러므로 일찍이 “십자군 전쟁”도 있었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도 치렀다. 서구유럽은 식민주의적 선교운동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피선교지 교회들을 모두 서구화 내지는 유럽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진리수호와 정통보수를 빙자하여 전투적이며 투쟁적이며 호전적인 기독교선교와 교회선교를 일관하였다. 심지어 교리나 주의를 놓고 원수가 아닌 형제까지도 원수시하고 제거하고 처단하고 정죄하며 처형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더 이상의 대립이나 대결이나 대적으로는 피차 생존하기 어려운 시점에 있다. 대립과 대결과 대적은 종말이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도 있지 않는가? 적대를 끝내야 한다. 제국주의에서 나온 식민주의적인 선교와 지배적인 선교를 버려야 한다. 이제는 화해와 공존 쪽으로 가야만 한다. 하찮은 미물도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여전히 종교간, 민족간, 문명간의 충돌의 현장과 위험이 상존하고 있지만 그래도 세계는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대화와 타협과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대화와 타협과 평화가 묘연한 곳이 우리의 한반도이다. 남북(南北)관계와 여야(與野)의 관계와 영호남(嶺湖南)의 관계, 그리고 노사(勞使)의 관계는 여전히 대립과 대결과 대적을 하고 있다. 성별(性別) 간의 끝없는 갈등과 대결도 우리에게는 숙제이다. 북(北)은 “남조선 해방”을 외치며 서울을 피바다로 만들겠다고 하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남(南)은 평양입성을 외치며 평양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하며, 여야는 끝없는 정쟁을 일삼고 있으며 영호남은 서로 싹쓸이한다고 한다. 사(使)는 노(勞)를 노는 사를 적대시하고 경원시하며 타도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남성은 여성이 여성은 남성이 서로에게 피해를 준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예수는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5:6.) “길”은 봉사와 섬김의 길이며 “진리”는 사랑과 용서의 진리이며 “생명”은 화해와 공존으로 지탱되는 생명이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는 빛과 같이 볕과 같이 물과 같이 어떤 제한도 한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구원의 복음은 악인도 선인도 가리지 아니 하시고 비춰주시며 파장을 하는 것이다. 열과 같이 복사를 하며 전도를 하며 스며든다. 그리고 물과 같이 흐르며 모든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면서도 다툼이 없고 넘치는 법도 없다. 여기에는 계급도, 성별도, 지역도, 나라와 민족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우주적인 의와 진리와 거룩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는 국경과 울타리와 경계와 제한과 제약이 없으며 거기엔 특성과 차이가 있을 뿐 우열이 없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밝음과 “너”와 “나” 그리고 “이것들과 저것들”이 함께 공생 공존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갈한 자는 누구든지 와서 마실 수가 있으며 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슨 감시와 위협과 공갈과 협박 등이 필요 없다. 그런데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무제한을 제한적으로 끌고 가는 기독교선교와 교회선교에 있어온 것이다. 그런 선교는 이제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 꼴이 되었다. 이전의 제국주의적인 선교에 대한 비판이 피 선교민들에게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외면하지 말아야 하며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친화처럼(창 14:18-20.) 사사시대에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삼갈(삿 3:30. 구약신학자 버네이는 주장하기를 삼갈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 “아낫”은 바벨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며 “삼갈” 역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을 보면서, 룻이 모압여인이었지만 구약성서의 한 책의 제목과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근래의 교황청의 횡보를 보면서 화해와 공존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복음선교는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어두운데 까지 내려가신 것처럼 복음선포자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복음선교는 정복이나 군림이나 제압이나 지배나 확장이 아닌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 그리고 피조물 사랑으로 섬김과 봉사와 사랑과 용서, 화해와 공존인 것이다. 또한 선교는 거래나 장사나 판매가 아닌 것이다. 복음선교는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주는 것이다. “서로 사랑”의 선교가 모든 것을 구원하는 복음선교인 것이다. “서로 사랑”이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크고 첫째 되는 새 계명과 분부와 지상명령은 “서로 사랑”이며 이를 통하여 오는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선교는 사람들을 기술적으로 설득하여 서구적 관점으로 한 종교에서 다른 한 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는 행위 정도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겁주는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복음선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복음선교는 피선교지를 유럽화나 서구화나 동방화 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복음선교는 지배하고 예속시키기 위해서 선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피선교지 민(民)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들의 생명과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 선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문화와 전통에 맞추어서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민족과 국가와 문화를 단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그대로 살려서 모든 민족과 국가와 문화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복음화이며 복음선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