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목회와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쓰기 본문
교회를 서열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목회에는 서열화가 없다. 그렇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통계자료를 소개한다. “1993년 미국의 ‘크리스찬 월드’가 발표한 것을 보면 세계 50대 교회 중에는 한국교회가 23개나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1.2위를 비롯해서 10위 안에만 7개 교회가 그 순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한국교회의 발전과 부흥에 의한 자력적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서구교회의 쇠퇴로 얻게 되는 어부지리적(漁父之利的)인 영예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편적으로 양적 규모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벌써 상당히 지난 자료이기 때문에 변동사항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어떻든 한국 교회의 짧은 역사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나 한국사회가 서구교회나 서구사회보다 더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원리에 부합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이 물음에 대해서도 대단히 회의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장을 거듭하다가 요즈음은 정체와 침체와 퇴보를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카루스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에 경제. 경영 용어로 정착한 ‘이카루스의 역설(Icarus' Paradox,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새가 되려 했던 사람, 이카루스(Icarus)는 감옥에 갇혀서 오랜 세월 동안 주워 모은 새의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서 탈옥을 감행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자 슬며시 마음 한컨에 오만함이 머리를 쳐든 것이 문제였다. 이제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탈옥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린 채 가능한 한 높이 날아오르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하늘 높이 날아오른 이카루스는 땅에 추락해 즉사하고 말았다. 강렬한 태양빛에 깃털에 붙인 밀랍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다.)’이란 말이 있다.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가 초기의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바로 그 때문에 실패를 자초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을 우리 한국교회와 목회 경영적 시각에서 적용하면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목회경영이 이카루스적 상황에 와 있다고 보면 너무 지나치다고 할 것인가? 이러한 한국교회가 새 천년의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거세게 밀려올 도전(挑戰)에 대응(對應)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는 위기적 상황이라고 진단하는 이들이 많다. 하찮은 성공에 도취해서 실패를 불러들이고 초기의 성장에 지나치게 집착해 당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이카루스의 모습이 한국교회와 우리의 목회자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목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의 경영원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경영원리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유전되고 답습된 종교의 지도자로서, 한 기독교의 교파 목사로서 목회경영을 해 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교파의 장벽에 갇혀서, 혹은 성장제일주의에 발목이 잡혀서 목회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를 지향해 온 것이 아니라 교파가 요구하는 목회를 지향해 왔고 세속과 자본주의 사회의 물량주의적인 병폐를 좇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보다는 유대교회의 제사종교나 율법주의로 되돌아가 있으며 바울의 초기교회와 로마카토릭교회의 종교 제국주의와 종교법에 더 친숙해 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장로와 서기관 노릇을 하며 하나님 나라보다는 제국적이고 왕국적인 목회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바로 그런 목회에서 나와야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유대교회나 초기교회나 로마카토릭교회를 답습하거나 반복하거나 재흥(再興)하거나 환원하거나 업그레이드하는데 있지 않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심의 충족이나 종교행사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구원론적 실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의 특징은 어떤 성전이나 회당이 중심된 목회가 아니었다. 제사가 중심이 되고 율법을 낭독하는 율법이 중심이 되고 종교가 중심이 된 목회가 아니라 비제사적이고 비율법적이며 비종교적이었으며 일상생활적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복음운동과 복음화 운동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삶이고 생활이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4
선지자 이사야가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신 것이며(마 9:13) 이는 제사나 율법의 행위나 실적이 아닌 마음의 자세를 말씀하시며 상한 마음을 요구하신 것이며 일상생활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이러한 주님이 가증히 여기는 것에 열을 올리며 답습(踏襲)하고 회귀(回歸)를 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성전적이거나 회당적이거나 왕국적인 유대인들의 목회와는 전혀 다른 헬라식 목회를 시작하셨다. 집합적(集合的)이 아닌 분산(分散)의 목회, 즉 소그룹의 목회였으며 고정식(固定式) 목회가 아닌 이동식(移動式) 목회였다. 마치 헬라의 소피스트(Sophist)들과 같이 진리를 나누는 목회를 하셨다. 진리는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며, 교훈은 다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작은 데서도 있고 교훈은 소수에서도 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셋이나 넷, 그리고 열둘이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여기서 예수의 12제자를 숫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숫자에 있지 않았고 성숙에 있었으며 참 복음인으로 만드는데 있었다. 복음에는 많아야 하고 커야하고 높아야 하고 세야 하는 교회나 목회나 선교는 거의 없다. 복음에는 참 교회, 참 목회, 참 선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맘모스교회”를 지향하는 목회를 해온 것이다.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목표는 맘모스교회에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여기셨던 예루살렘 성전종교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마르틴 루터가 목숨 걸고 싸웠던 중세의 왕국적인 로마카토릭교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목회에서 나와야 하며 또한 우리의 목회가 세속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물량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목회의 방향을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건강구조로 전환을 해야 한다. 건강하고 성숙하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고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복음선포였으며 복음을 나누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부분의 복음선포를 비유나 잠언으로 하셨다. 예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는 이유는 알기 쉽게 말씀하시려는 의도도 있지만 비유로라야만 영원성과 무궁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는 시간의 한계가 없으며(Timeless), 공간의 제약도 없으며(Spaceless), 무한하고 무궁성(Endless)을 가지고 있는 복음 선포의 장르이며 양식인 것이다. 비유로 하지 않으면 한 시대로 끝이 나고 만다. 인류가 축적한 “만고의 진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수, 시간, 공간, 외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은 의미는 주지만 시간성을 넘지 못한다. “만고의 진리” 즉 “원리와 법칙”을 깨닫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였다. 그리고 잠언은 때로는 비유와 같이 “만고의 진리”와 “원리와 원칙”을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사물에 대한 보편적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와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도전적이며 전복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잠언에는 과장과 웃음 그리고 아이러니와 역설, 기지와 재치와 유머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전적으로 예수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복음서 안에 담겨진 육성의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의 복음을 전하여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목회는 독차지하고 움켜쥐고 나만 생각하며 찰라만 생각하는 데 있지 않다. 복음목회는 나누는 것이며 함께 하는 것이며 연합과 일치를 위하며 영원성과 무궁성을 지향하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모든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적인 목회였으며 아무도 소외되거나 제외된 목회를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작은 이들조차도 넘어지게 하지 않는 목회”(마 18:6) “작은 이조차 업신여기지 않는 목회”(마 18:10)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목회”(마 18:14)를 하셨고 그리고 그 목회를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목사들에게 위탁하신 것이다(마 28:19-20).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졌다는 세간의 비판이 있어왔다. 높아지려고만 하고 커지려고만 하는 목회와 교회에는 복음이 짓밟히게 된다. 작은 자를 향하여 낮은 자리에서 섬김과 봉사와 희생을 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닮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짐을 지우는 목회를 하신 것이 아니라 가볍게 하고 쉼을 주는 목회를 하셨다(마 11:28-31). 자유를 주시며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목회를 하셨다(눅 4:18-19).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는 어떠한가?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교회에 잘 적응하는 신자로 키울 것인가만 중요시하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론적인 목회에 집중이 되어 있지 근본적으로 신자들의 전인적이고 통전적인 구원에는 관심이 덜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위축되고 길들여져 가축화된 그리스도인이 대접을 받고 추앙을 받으며 좋은 교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위축되고 길들여져 가축화된 교인을 만드는 목회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자율적이고 자구적이고 자동적이 능동적인 인간, 인간의 참된 인간화에 역점을 두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원리에서 구원의 복음목회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송기현의 살림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와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 쓰기 (0) | 2007.01.04 |
---|---|
선교와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쓰기 (0) | 2006.12.29 |
신학과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 쓰기 (0) | 2006.08.08 |
교리신학의 문제점 (0) | 2006.07.15 |
구원신학의 출발점 (0) | 200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