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구원신학의 출발점 본문
어떤 학문을 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시작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특히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신학을 할 때 그 시작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올바른 시작은 올바른 결과에 도달하고 그릇된 출발은 그릇된 결과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백두산 천지(天池)의 물방울이 동으로 향한 것은 동해(東海)에 이르고 서로 향한 것은 황해에 도달한다. 처음 천지를 출발할 때에는 불과 지척(咫尺)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는 천리(千里)의 먼 거리가 생기고 만다. 구원신학(救援神學)의 시작도 마찬가지이다. 올바른 시작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밝히는 학문이 되겠지만 그릇된 시작은 인류를 불행의 벼랑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구약의 유대종교와 초기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이제에 이르기까지 율법이나 교회의 교리나 교회법이나 신학 등에 의해서 묻히거나 덮이거나 막히거나 가리워져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면 구원이란 유대인들이 말하거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과는 거리가 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율법적이며 도덕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이 오는 줄 알았으며, 그들에게는 정결제도(淨潔制度)가 있는데 그 정결제도에 의한 정결과 성화가 구원의 관건이 된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구속하시며 희생제사를 통한 죄 값의 속량을 통한 구원을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론도 유대화로 회귀하는 경향에 있거나 극단적으로는 수동적, 피동적, 타율적이며 제의적인 구원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데서 온다. 실적으로 공적으로 선행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윤리적인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빠진 상태에서” 건져내고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고 “억울한 곳에서”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셨으며 빠지지 않게 하고 살았으나 죽은 상태가 되지 아니하고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이 구원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바벨론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리고 악에서 죄에서 그로 인하여 오는 인간의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셨다. 구원은 인간의 실적으로 공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적인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상한 심령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지고하고 자비로운 사랑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종말적인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삶의 양식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율법주의자들보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신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그(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교리를 완성함으로서 모든 예언에 종국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을 삼지 못하고 의질적인 무엇을 거기에 끼워놓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신학을 복음에 끼워놓은 일을 하고야 말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복음을 통하여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울 만큼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드러내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한 참 구원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정립함으로써 세 번째 천년기를 시작하고 있는 신학과 목회와 선교와 교회에, 마치 닫쳐진 창문을 열었을 때 신선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갈리진 논과 밭에 생명의 맑은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여러 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다가 그곳으로부터의 탈출하여 밝은 빛을 받았을 때와 같이, 피가 부족해 죽어가는 육신에 새 피가 수혈되는 것과도 같이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흘러들어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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