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신학과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 쓰기 본문

송기현의 살림신학

신학과 관련하여 본 구원론 다시 쓰기

유앙겔리온 2006. 8. 8. 20:22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만을 말씀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사도들과 교부들과 초기교회와 이후의 교회가 자기들의 유전이나 전통이나 문화나 사상이나 종교로 역사나 사회에 변증하고 설명하고 변호를 하다보니 교리신학(敎理神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서 서신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서들 역시 신학적인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중에 가장 먼저 저술되었고 다른 두 복음서의 기초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마가복음조차도 예수 활동의 역사적 순서에 대한 어떤 지식도 기초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마가복음서 기자는 그에게 전승된 개개의 보도들이나 혹은 보도 계열들을 신학적 기본 사상을 가지고 배열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의 보도는 결코 변하지 아니하고 전승된 기억을 예수의 삶과 그 자리에서부터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전체적인 구전 전승이 기독교공동체의 선포와 신앙과 교리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형식과 변형으로 보존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나 교회에 과학이 들어온 것은 십자군 전쟁과 르네상스(Renaissance ; 1440-1540)로부터였다. 종교개혁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 문명에 접한 교회는 르네상스의 물결을 통하여 문예부흥 운동 못지않게 고전(古典)을 되찾은 것이 성서연구운동인 것이다. 르네상스로 말미암아 콜럼버스(Columbus, 1446-1506)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와 브루노(Bruno, 1548-1600)나 케풀러(Kepler, 1571-1630)나 갈릴레이(Galilei, 1564-1642) 등이 나오며 전통적인 성서관과 우주관과 자연관과 과학관은 무너지고 혁명적인 새 파라다임을 맞게 된 것이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과학이 대두되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모든 것이 1차적인 대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기독교신학이나 교회신학이나 성서신학에도 일대 전환점이 왔다. 그 중에 가장 자유분망한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신학적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으며 예수의 신성보다는 그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초자연적인 존재와 이적과 기사를 인정치 않으며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나 재림이나 심판은 미신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인류의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동료, 도덕적 이상의 교사,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또는 혁명가 등으로 이해되었었다.

 

    이와 같은 신학의 전환은 성서를 절대시 한 개혁교회에 예기치 않는 성서신학을 몰고 오게 했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s)” “자료비평(Source Criticisms)”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s)”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s)”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s)”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s)” 등과 같은 성서비평학이었다. 이러한 성서비평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강조점을 “후 부활시대(The post-Easter period)”에 두고 있다. 그것은 성서신학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신학이나 교회신학에까지 적지 않는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고등비평학은 신앙과 신학의 원천으로서의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일회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음을 제시한 것이다. 과학적 지식으로 비판하고 공격하는 비평적 신학 앞에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이나 교회신학이나 성서신학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으며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역으로 보수와 정통을 표방하는 근본주의(根本主義)가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변증적(辨證的)이고 변론적(辯論的)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에 지나지 않았으며 열광적 신앙만능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변론적이고 변증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신학은 독선적이고 절대적인 아집에 빠졌다. 독선적이고 절대적인 종교나 정치나 사회는 독선적일수록 절대적일수록 다른 것이나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신학의 양대 주류는 비판적인 신학과 그것을 방어하려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원리주의적 신학의 끊임없는 폭로와 그것에 대항하여 변호해야하는 과정에서 빗게 되는 고역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야 이러한 신학적 방법은 존립 가능한 선택 안이 아닌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제 2차적인 대 전환인 복음신학(Evangelical Theology)의 절대성으로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성서는 양식비평, 자료비평, 편집비평, 본문비평, 역사비평, 문학비평 등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는 일점일획의 오류라도 있을 수 없으나 성서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어려 방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서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방법뿐 아니라 사회학적 방법(Social Method)이나 최근 구조주의적 해석(구조주의의 언어학 이론을 성서 해석에 적용한 것인데 언어의 심층구조 속에 의미가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성서해석학적 방법)과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s ; 이 방법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바탕을 둔 해석 방법으로서 성서의 본래적 의미라는 것이 본문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는 독자가 본문을 읽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그때 그때 생성된다고 보는 주장이다.), 청중비평(Audience Criticism ; 청중비평은 미국 오하이오(Ohio)주 우스터(Wooster)에 있는 우스터 대학의 종교학부 책임자인 버어드(J. Arthur Baird)가 컴퓨터를 활용하여 복음서들의 희랍 본문들을 세밀히 검토하여 예수가 그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을 위해 선별적으로 교훈을 선정하는지에 대해서 조사했고 그리고 예수께서 그 말씀을 적절히 선별해서 청중들을 위해서 가르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책 Audience Criticism and the Historical Jesus에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가 그 말씀을 전해준 청중들에 관해 주의 깊은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등 그리고 앞으로 구축될 새로운 성서 해석의 방법론이나 비평학에 의해서 언제든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어떤 비판이나 비평이나 분석이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무엇으로 비판이 되고 비평을 가하고 그 어떤 것으로 분석이 되어도 오히려 복음은 빛이 나며 더욱 영원히 불변한 말씀으로 광채가 날 뿐이다. 진짜 보석은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은 이러한 모든 신학적 결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밝혀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재발견하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계명인 율법에 있는 유대종교로는 모든 민족의 구원이 불가능함으로 새 계명과 새 분부와 새 진리와 새 복음과 새 언약과 새 영과 새 정신과 새 술과 새 부대를 말씀하시며, 옛 계명인 율법에서 떠남과 나옴과 단절과 결별을 말씀하며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유앙겔리온”은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로서 바로 성전종교나 제사종교 율법종교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나라이며 그것을 증거해 내는 교회이며 이것을 위한 그 백성들에게 주신 새 선포이며 새 명령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헐라”하신 것은 이러한 성전종교나 제사종교나 율법종교의 증축이나 개축이나 보수가 아닌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를 신축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축에는 기초며 골격이며 벽이며 지붕을 완전히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새법 앞에서는 구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신․구법을 섞어 놓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돈에 있고 혼란에 있으며, 모순과 자가당착과 이율배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이나 완료에는 추가나 보완이나 첨가가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업그래이드(Upgrade)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신학들과 비복음적인 성령운동과 계시운동들 때문에 감히 전능자이시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완성하신 구원의 도에 온갖 부수물들이 덧붙여지고 첨가가 되고 유입이 되어 있는 것은 구원의 본질을 어둡게 하고 흐려놓으며 그 가치를 현저히 낮추는 것이다. 예수가 나오고 떠난 인종주의의 편협과 근본주의의 속 좁은 율법주의로 다시 회귀하고 귀속한 교회를 신학이 도리어 뒤를 봐주고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행에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기독교나 교회 자체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전통적으로 유전적으로 켜켜이 쌓은 먼지와 오점을 걷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새의 털 하나하나는 지극히 가볍고 적은 것이지만 그것이 수억이 쌓이면 큰 배를 바다 속으로 침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물려받은 많은 교리 체계나 신학의 방법론 중에는 대단히 오랜 전통을 가진 것도 있지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근자에 들어 수정 강화된 것들이 많으며 특정 시기에 교회가 처한 상황에 적절히 답하기 위해 물려받은 신앙적 유산의 특정 부분을 계속해서 선별하여 강화해왔음도 잘 알고 있는 바다. 다시 말하자면 교리 체계나 신학의 방법론은 특정 시대와 정황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리사(敎理史)나 신학사(神學史)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정의 한 시대와 정황의 산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직화되고, 그 같은 대답을 해야만 했던 이유들을 종종 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후의 세대들은 의중과 정신을 잃어버리고 문자에만 매달려 화석화(化石化)된 의문(儀文)를 만들게 된다. 이것은 결국 “종교적 감금”을 가져오게 하여 유연성과 융통성과 생동력을 잃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합리성을 크게 손상 받기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것은 결국 오늘의 다변화와 다원화와 다양한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 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는 신학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지극히 제한된 서구신학을 도입하는 도입신학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의 토착화가 없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서구신학을 도입이나 하고 모방이나 하고 백화점식으로 나열이나 하고 답습이나 하며 그것을 정통시하는 독선과 아집에 빠져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중신학”이라느니 “한국신학”이라느니, “아세아신학”이라는 말도 하고 있으나 한국교회가 창출한 신학은 전무한 상태에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는 서구신학을 답습하는 신학이나 또한 지방신학이나 지역신학이나 민족신학이나 국가신학을 지양한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인 온갖 교리신학과 민족신학과 정황신학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다. 신학은 이제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바른 신학이 바른신앙과 바른생활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 연구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아들이 완성하신 구원의 도에 온갖 부수물들이 덧붙여지고 첨가되고 유입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경직된 조직신학과 교리 밑에 감추어져 있고 그냥 덧붙여 놓거나 묻어 놓거나 포함시켜 놓아 늘 가리워져 있거나 외면되고 있거나 심지어는 제외가 되기도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재발굴하여 신학화하고자 한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필자의 실존 사이에 끼여 있는 2000년의 간격을 괄호 속에 넣어버리고 그의 구원의 복음으로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지류(支流)나 지천(支川)을 원류(源流)나 원천(源泉)으로 착각하고 우기고 변명하고 협박까지 일삼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