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창조와 구원의 원리인 "서로 사랑" 본문

송기현의 살림신학

창조와 구원의 원리인 "서로 사랑"

유앙겔리온 2006. 6. 5. 07:33
 

    곽노순은 「꽃과 바위와 구름 그리고 원자와 우주의 파노라마 -창조세계의 신학적 감상」에서 “우리들이 피차 얼굴 모습이 다르다 할지라도 원자적인 질료(質料)는 털혹의 차이도 없어, ‘내 몸’의 재료와 ‘네 몸’의 재료를 교체할 수 있다. 누구나 동일한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원자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으니 신비감이 갈수록 더해진다”고 했다. “서로 사랑”은 우주적인 원리이며 창조와 구원의 원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세월동안 창조와 구원의 원리를 대적과 대립과 정복으로 생각하며 원수시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들어서 그 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내적 변화를 살펴보더라도 구원론 때문에 로마카토릭교회와 루터교회가 500년 동안 원수시하고 적대시를 했는데, 루터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불을 붙인지 482주년이 되는 날 화해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체코의 프로테스탄트교회와도 584년 만에 화해를 하기에 이르렀다(교황 바오로 2세는 1999년 12월 18일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1415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데 대해 “후스에 가해진 잔인한 죽음과 그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분열과 갈등으로 보헤미아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교황청은 지난 2000년 동안 범했던 과오들을 2000년 3월 5일에 ‘회상과 화해-과거 교회의 범죄’라는 공식 문건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그 죄과를 인정하고 참회하였다. 그들이 숫자적으로 열세여서 그랬겠는가? 지금도 개신교의 4,5배에 해당하는 막강한 교세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런 일을 스스로 자처해서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종교적 신앙의 열정으로 해온 많은 일들이 이제야 모순이나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에 빠졌던 것임을 안 것이다.

 

  아직도 모순이나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이 신앙이란 미명 아래 감추어지고 당연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지 못한 처사인 것이다. 천기도 분별해야하지만 시대의 표적도 분별해야하는 것이다(마16:1~3).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막2:22). 이러한 시대적이며 종교적인 환경은 결국 종교적인 왕국주의(王國主義)나 제국주의(帝國主義)도 종식을 고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대립과 대결과 대적에서 이김으로 오는 구원론을 말하여왔으나 이제는 화해와 공존으로는 오는 구원론으로 전환을 하는 역사에 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 역사의 대 전환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하는 길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개혁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도 오히려 로마카토릭교회가 이러한 시대의 표적을 읽고 발 빠르게 대처를 하며 변혁과 변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인식을 하고 하는지 그렇지 아니하고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원의 역사는 대립과 대결과 대적에서 오거나 이기고 지배하고 정복을 하여야 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구체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론이 난 서로 사랑,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화해와 공존의 구원의 복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