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인간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종말적인 구원의 역사는 어느덧 발전의 세기였으며 또한 대결과 갈등의 세기였던 20세기의 그 지친 자락을 접고 2천 년대의 새 밀레니엄(New Millennium)으로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대 전환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다른 밀레니엄을 향하여 힘차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밀레니엄이 교차하는 전환기에 즈음한 기독교와 교회는 신학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임을 표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천년을 희망차게 엮어가기에는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가 이러한 원리와 원칙을 너무도 멀리 떠나 있거나 많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재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포로화에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째서 부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와 무엇과 어디에 포로가 되었는가? 부재한 복음은 되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포로 된 것은 자유롭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지 벌써 20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은 여전히 부재하고 묶여 있고 포로 되어 있는 것은 어찌 되어서인가? 이제는 잃어버린 것은 찾아야 할 때이고, 묶여 있는 것은 풀어야 할 때이며, 포로 된 것은 자유롭게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신학의 목표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더 훨씬 문제인 것은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믿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를 그릇 믿으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천국문에서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고자 하는 남들도 못들어가도록 두 팔 벌리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얼마나 분주하게 그리고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하는 것, 옳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학이 바로되지 않으면 그 위험성이 얼마나 크겠는가?
지금 신학과 목회와 선교와 주님의 교회는 복음서의 기자가 “근원(根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서”(눅 1:3)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했던 그 자세가 더욱 필요한 때이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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