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그릇된 열심 본문
세상엔 우리를 감동시킬만한 아름다운 모습들이 참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일을 땀 흘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그런데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역겹고 추하며 소름이 끼치는 모습들이 있다. 그것은 그릇된 열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열심도 의와 신과 거룩에 붙잡혀 된 것이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악인의 열심을 본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와 비복음적인 이들의 열심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열심이 남긴 부끄러운 흔적을 본다. 열심에는 이처럼 올바른 열심도 있지만 그릇된 열심도 있는 것이다.
어떤 목사가 먼 도시로 여행을 갔다가 옛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목사에게 물었다. "자네 교회의 교인수가 얼마나 되나?" "천명쯤 되지" "그래? 대단한데!" 놀라워하며 친구가 계속 물었다. "그들 중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그들 모두가 다 적극적일세. 약 2백 명은 주님을 위해 적극적이고 나머지는 악마를 위해 적극적이지"했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분류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게 될까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나 사람에 대한 열심이나 맡은 일에 대한 열심이나 생업에 대한 열심은 대단히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열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열심이 올바른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열심이거나 사람 사랑이 없는 열심이면 그 열심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참으로 해로운 것이 될 수 있으며 열심을 내는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잘못된 열심은 그 수고의 가치를 상실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남긴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게 되고 만다. 열심이란 말은 본래 "열심, 열정"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시기, 질투" 등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열심이고 열정이지만 나쁜 의미로 사용되면 그것은 시기, 질투, 악의, 분노, 진노, 보복 등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열심이 특심한 자를 찾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올바른 성경 말씀에 지배를 받아서 내는 열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낸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세상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든지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내는 열심은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열심도 그렇다. 사람을 향한 열심은 반드시 사랑의 지배를 받는 열심이어야지 사랑 없이 내는 열심은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에 대한 열심도 그렇다. 무조건 열심을 낸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악한 일에 열심을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일 선한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냈다. 사울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열심을 냈다. 그것은 원리주의에서 나온 열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원주리주의자들의 열심이 가져오는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열심은 그릇된 열심인 것이다. 그릇된 열심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자타에게 손해를 끼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열심을 버리고 바른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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