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체면문화를 고쳐야 한다 본문

살림운동

체면문화를 고쳐야 한다

유앙겔리온 2002. 9. 18. 11:44


언젠가 김포공항에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든 허름한 스웨터차림의 젊은이가 나타나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그는 잠시 멋적은 표정을 짓더니 총총히 발길을 돌려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컴퓨터 황제’ 빌게이츠였다. 어느 기자가 중얼거렸다. "정말 빌게이츠가 맞긴 맞는 거야?" 그럴 만도 했다. 세계 제 1의 갑부라면서 수행원 하나 없이 손수 짐을 들고 나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방을 들어주는 수행비서가 없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최고경영자들. 큰 결정만 내리면 영업이야 아랫사람들이 하는 것 아니냐고 믿는 기업인들은 필마단기로 한국시장을 바람처럼 휘젓고 다니는 빌 게이츠를 한번쯤 눈여겨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허례허식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겉치장문화에 매료되어 있다. 장례식도 그렇고 결혼식도 그렇고 명절을 지내는 일도 그렇다.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곳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쓴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체면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남들 눈도 있는데 어찌하겠느냐는 반응이다. 그래서 인간은 가면을 쓰게 되는가 보다. 인물을 뜻하는 영어 ‘person’은 라틴어의 가면(persona)에서 왔다. 로마의 희극시인 테렌티우스가 ‘인물’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가면을 쓴 사람이 인간, 인격의 뜻으로 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굴을 덮어 위장하는 가면이 퍼스랠리티의 어원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간은 이중적이고 다층적이며 위선과 거짓에서 자유롭지 않는 존재임을 꿰뚫어보게 한다. 결국 이중적이고 다층적이고 위선과 거짓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느냐가 그 인격의 높고 낮음을 결정해주는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고 남의 시선도 따갑게 느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禮)의 차원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면 인격의 파멸이며 자신에게 뿐 아니라 상대에게 욕이 되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전직대통령의 예우법에 의하여 전직대통령이 이동할 때 교통신호를 조작하여 편하고 쉽게 가도록 하는 특례가 있나보다. 그런데 세상에 전직 대통령이 집에서 아주 가까운 이발소에 가고 식당에 가고 목욕탕에 갈 때도 교통신호를 조작하여 예우를 했다고 하니 참 웃기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전직 대통령의 체면이 서는 것일까? 참 답답한 일이다.

안전보다는 체면 때문에 수행비서나 경호원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관료들과 기업인들이 아직도 많은가 보다. 좀더 큰 차, 좀더 큰 집에 살아야 체면이 서는 줄로 아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와 같은 체면문화는 결국 과잉화과 대형화를 가져오며 그것이 내뿜은 매연은 온갖 것들로 질식케 한다. 검소와 작음이 아름다움과 존경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사는 것이다. 자연도 살고 이웃도 살고 우리 다음 세대도 사는 것이다.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은 어떨까. 수의 만들지 말고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관하고 관도 좋은 것 쓸 필요 없이 그냥 시신만 담을 수 있는 허름한 것으로 하라고 하면 어떨까? 내 모친의 수의준비에 관심을 기울이던 모습과 내 부친께서 낮은 봉분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죽어서라도 좋은 수의를 입고 큰 봉분에 묻히고 싶은 그 체면의식, 이 병을 어찌하면 고칠 수 있을까? 썩으면 티끌이 되고 흙이 될 것을 또 무얼 바란다는 말인가? 사는 이나 죽은 이나 체면문화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