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자승자박(自繩自縛) 본문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은 자기가 늘어뜨려 놓은 줄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말하는 한자숙어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성서에 있다. 잠언 26:27에“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했다(전도서 10:8,9 참조).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자기가 걸리는 자업자득인 샘이다. 남 넘어뜨릴려고 음흉하게 계교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명이나 율례나 법도를 그런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자승자박의 역사가 이런 것이러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대인의 역사를 의인이 고난 받은 역사로 구속사적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유대이즘의 안경을 쓰고 유대인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을 편들고 미화하는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의 역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어다보면 유대인들의 역사는 자승자박의 역사였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승자박의 역사 속에는 유대인들의 정치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정치원리는 거룩의 정치, 정결의 정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하나님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이 정치원리로 도그마를 하고 합리화를 하고 우격다짐으로 우기고 막무가내식으로 떼를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미움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도록 넘겨진 것은 유대인의 정치원리와 예수님의 정치원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거룩의 정치원리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룩의 정치 대신에 사랑의 정치를 말씀하신 것이며 사랑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만이 구원을 이루는 길과 진리와 생명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거룩의 정치는 경계를 짓고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붕당과 파당과 분열과 분리에 열중하게 된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을 더럽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한 것이었다. 그래서 거룩의 정치로 유대사회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유대 사회 내부를 철저하게 분리(分離)시키고 분산(分散)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씨족적 부족적 민족적인 고립 신앙(孤立 信仰)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로 부족과 씨족과 민족에서 제외된 이들이 끊임없이 양산되는 정결의 정치로는 분리와 분열과 구별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좀더 이 문제를 확대해서 중동지역을 살펴보면 지금까지의 이스라엘과 유대민족이 겪어온 모든 역사는 결국은 자승자박(自繩自縛)과 같은 결과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쫓나내고 분리를 하고 분열을 한 결과인 것이다. 원래 저들의 근본은 하나였던 것이다.
정결의 정치로는 인류에게 구원이 없는 것이다. 찬송가만 틀리고 예배의 형태만 틀리고 예배당 모양만 색달라도 분리를 하고 얼굴색갈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가차 없이 몰아내고 쫓아내고 하는 곳에는 끝없는 갈등만 있을 뿐이다. 주님은 어린아이도 여인들도 병자들도 창기도 세리도 죄인도 결코 분리가 아닌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셨다. 거룩의 정치원리를 가지고 이리저리 나누고 분리하고 헤치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오직 서로 사랑의 정치원리가 숨쉬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쁜 결과는 자승자박의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조그마한 나쁜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드러다보고 깊이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자승자박임을 깨닫게 된다. 곤고한 일을 만날 때 먼저 자기를 돌아보아야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