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느 때까지리이까?(합 1:2~4) 본문
어느 때까지리이까?
합 1:2~4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합1: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는 상황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 시대는 국제적 정세로는 대세가 애굽이나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으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라는 4개의 단어로 묘사할 수 있는 여호야김 왕의 통치시대였습니다. '겁탈'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겁탈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파괴되었고 사회는 불안했습니다. '강포'는 자기 동료마저 해칠 정도로 극심한 폭력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는 통치 계급이 불의한 편에 서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였습니다. '변론과 분쟁'은 논란을 벌이며 서로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열을 선동하고, 분파를 확대시키고, 서로 격분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말할 것이 없고 남 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무죄한 피를 흘렸던 왕들이 많았지만 특히 유다의 모든 악한 왕 중에서 여호야김은 악을 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피신하여 애굽에 몸을 숨긴 선지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잡아다가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렘 26:20-23). 그리고 예레미야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장 한장 칼로 베어내어 불살랐습니다. 그만큼 악한 왕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하박국 시대에 유다는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영적으로 배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고 심지어는 이 혼란을 이용해서 자신의 영달을 취하려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일들이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터널에 갇혀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선두에 서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아가야 하는 이가 바로 하박국이었고, 그가 외로이 부르짖고 외치는 외침이 바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리이까?"였습니다.
'하박국'은 '포옹하다. 품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는 그 이름대로 "껴안는 자, 포옹하는 자, 백성들을 달랜 사람,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고통을 당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한 선지자"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어느 때까지리이까?"하고 하소연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때까지리이까?" 부르짖는 표현방식은 하박국 선지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고난당한 다윗도 기도 중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했고, 아삽도 같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79:5), 계 6:10절에도 보면,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리이까?"하고 질문을 하다가 피곤하여 잠이들고, 이 질문을 하다가 하염없이 죽어갔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 질문은 아주 오랫동안 선지자들과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인생들을 괴롭혀 온 질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고 동일한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를 하나님의 때로 생각하지 못하고 내 때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조급해지고 서운해지고 억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할실줄로 믿으면서도 "어느 때까지리이까?"하는 불만과 항의를 하고 하나님께 질문을 퍼붓는 일을 합니다.
죄를 벌하시지 않고 참으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박국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선지자와 하나님 사이에 참으로 친밀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활동하시지 않으심, 악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심이 불의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한자들은 그들의 힘과 재물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데 사용하고 가난한 자들의 권리는 유린당합니다. 여전히 의인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악인의 먹잇감이 되었고 그들의 삶은 더욱 힘들졌습니다. 그러니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박국의 이와 같은 "어느 때까지리이까?"하는 질문은 하박국시대만 국한된 것도 아니며 성서시대에만 있었던 질문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외치는 외침이 외면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속에서라면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나, 누구의 입술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외쳐지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박국의 외침과 질문을 이렇게 묵상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이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불신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불신해서나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하박국서 전체의 내용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하박국은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기대와는 다른 응답을 주셨고 하박국은 그것을 기꺼이 수용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이 알고 있는 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평스러운 질문을 한 일들에 대해서 모르시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시며 그분의 보좌에서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이 크게 보여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애원하고,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너무 느리다고 빨리 빨리를 외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하소연하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것을 생각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뿐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한 온 세상 전체를 보고 설계하시며 그것을 실행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심없이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방관하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시지만 다만 하나님은 심판의 때를 유보하실뿐이지,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식으로 반듯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루실 것을 하박국을 통해서 교훈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랫 동안 기다려야 한다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더딜지라도 정한 때가 있으니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살면서 오늘 제목과 같은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질문을 안 해본 신앙인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신앙인들 뿐이겠습니까? 모든 인생 누구에게나 주어졌을 법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질문은 의심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내일 하루가 지나면 3.1절입니다. 일제 시대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일제에 항거하면서 우리의 믿음의 선각자들도 함꼐 참여한 백성들도 "어느 때까지리이까?"하면서 만세운동을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되었고 우리는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를 더 지나면 3월 2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님도 때와 기한을 아버지께 맡기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느 때까지리이까?"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수 없이 많겠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내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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