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렘 14:7~12) 본문

인간의 질문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렘 14:7~12)

유앙겔리온 2022. 2. 11. 21:34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렘 14:7~12

렘14: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렘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렘14: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렘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렘14: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렘14: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예레미야시대에 유다에 심각한 가뭄이이란 환난이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뭄의 참상이 험악합니다. "유다에 힘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사환들을 우물에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조차도 물을 얻지 못하고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릴 수 밖에 없었고,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릴 지경이었으며, 심지어는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 지경"(렘 14:3~6절)이었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에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7절 한 절에 "우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백성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들의 대변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고난 당한 때의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자이십니다. 환난에 처하면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것입니다. 유다의 백성들도 선지자 예레미야도 당연한 것을 요구하듯이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원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대에 부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당연한 것일까요?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뭄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앞에 섭섭한 듯한 태도와 자세를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볼맨소리로 질문을 쏟아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품고 있는 것을 그의 기도에 담고 있습니다. 8~9절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이 질문이 예레미야의 기도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마치 이 땅에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같이 이스라엘 땅에 환란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으신 것 같이 계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하나님은 마치 놀란 사람처럼 되시고, 구원할 힘이 전혀 없는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질문한 것입니다. 

  거류인이나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가 무엇입니까? 길손입니다. 행인입니다. 여행객입니다. 낯선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땅의 환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머무는 땅은 잠시 머물다가 무사히 빠져나가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백성들이라"고 계약된 그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잠깐 왔다가 가버릴 사람처럼 우리를 모른척 하십니까? 왜, 제 3자가 되신 것처럼 그러십니까? 왜, 용사처럼 편팔과 강한 손으로 구원하시고 건져주시던 기적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고 놀란 토끼눈을 한 사람처럼, 구원할 힘이 전혀 없는 용사처럼 그렇게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유다백성들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을 멈추시고 구원해 주실 심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절망입니다. 낙심(落心)입니다. 그러나 절망, 낙심, 낙담, 비애는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선한일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파괴시켜 영혼과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뿐입니다. 마음속에 온갖 미움과 질투와 시기심을 주입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과 삶을 갉아서 병들게 만들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낙심의 영'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낙심하거나 비애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유다를 위해서 다시 2차 3차 기도에 매달립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거류민처럼 되시고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되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연약하셔서 놀란 또끼눈처럼 하고 있으시거나 나가 싸워서 구원할 힘이 없는 용사처럼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10절에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여전히 그들이 가는 길은 멈추지 않고 고집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능력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주인처럼 하시지 않고 거류인처럼, 행인처럼 나그네처럼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는 우리의 기도가 입술의 기도만이 아닌  우리의 마음의 변화로 이어지기는 믿음의 기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거류인처럼 나그네처럼 하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유다의 환난날에 하나님이 주인처럼 하지 아니하시고 거류인처럼 나그네처럼 하신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거류인이나 나그네나 손님이 되시지 않도록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서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모른채한 것처럼 느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경멸의 말을 하고 낙심에 빠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우리를 바꾸고 싶어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변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백성들도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람들은 그와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왜 변하지 않느냐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치 유다 땅에 거루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같이 이스라엘 땅에 임한 환란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으신 것 같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마치 놀란 사람처럼 되셨고, 구원할 힘이 없는 용사처럼 되신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고 낙심하여 불신앙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이 길어지면 견디어 내기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환난은 반드시 인내를 이루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