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리이까?(렘 15:15~21) 본문

인간의 질문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리이까?(렘 15:15~21)

유앙겔리온 2022. 2. 16. 13:14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렘 15:15~21

렘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렘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15: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렘15: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렘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15: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5: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라로 부르실 때 "너는 그들을 두러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사역을 하면서 지금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주셔서 그의 대적들을 물리쳐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 의해 박해와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께서는 방관자처럼 가만히 계시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와 같이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항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마치 인생인양 몰아붙여 세워놓고는따지듯하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눈물의 선지자로서 울고나 있줄 알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언쟁이라도 하듯이,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이라도 하듯이 어느 선지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몰아붙입니다.  

  이러한 예레리야 모습이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는 중심주제가 못됩니다. 거기에 매달려 오늘 본문의 주제에서 벗어나버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는 직설적인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돌려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체면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꾹참고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덮어두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알고 있는 것과 상반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꺼리낌 없이 솔직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도 그 태도와 자세를 면박을 주거나 잘못되었다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담아놓고 속으로 썩고 터져서 도저히 가망없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썩고 터지기 전에 속을 드러내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답답하면 하나님께 달려나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몰아붙이면서까지라도 울부짖고 소리질러 기도하세요. 이것이 예레미야의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적인 특징입니다만은 이스라엘 광야 지역에는 와디(wadi)라 부르는 하천이 있습니다. 우기가 되면 갑자기 내리는 비로 말미암아서 시내가 철철 넘칩니다. 그러다가도 비가 그치고 건기가 시작되면 바싹 말라서 모양만 하천이지 실재로는 마른 땅입니다. 이러한 개천을 와디라고 합니다. 광야를 지나는 목마른 여행객이 멀리서 시냇물이 있는 것을 보고 저기까지만 가면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참자 그러면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기진맥진 찾아갔다가 바닥까지 바싹 말라 있는 하천을 보았다면 그 여행객의 실망이 어떠하겠습니까? 멀리서 보니 물이 흐르는 시냇물인 것 같아 기대를 안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물은 전혀 없고 강바닥만 보이고 있는 와디라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속이는 시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친 상태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겨우 하나님께 달려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레미야에게 전혀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가르켜 "속이는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르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셨고 다른 신들을 가르켜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목마른 자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웅덩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또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을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장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을 속이는 시냇물 같다"고 할 정도이면 예레미야가 지금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중하고 무서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고쳐도 고쳐도 낫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면서 실망하고 낙심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앞에 나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선 길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대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실망한 하나님에 대해서 생수의 근원이라 하시면서 내게 오면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은 이제 와서 보니 생수의 근원인 샘물이기는 커녕 바싹 메마른 속이는 시내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엄살을 떨지 않아서 그렇지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일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예레미야와 같은 탄식을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모세와 엘리야도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민 11:5절에서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했고, 엘리야는 왕상 19:4절에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했습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시는 것처럼 느낄 때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증인들은 의문과 두려움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 있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고 시험과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그 시간에 과감하게 정직성을 드러내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고뇌와 번민이 담긴 시간이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속에서도 그 분께 기도하는 그의 습관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시련과 시험 그리고 유혹의 시간을 견뎌내고도 주님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으로 고백할 만큼 어려운 시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불어서 끝가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0~21절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속이는 시내와 같은 분이 아니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속이는 시내"처럼 느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앞에 질문을 내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속이는 시내"가 아니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는 시내"가 아님을 알게 하실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