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12) 본문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12
시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시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시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뵐 낯이 없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숨으면 숨겨지리라는 생각을 했으니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합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숨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피할 대상쯤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숨고 도망가면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숨고 싶은 충동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숨고 싶은 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망치고 숨는다면 그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는 곳을 상상하거나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도리어 피하고 숨을 수 있는다는 꿈에서 깨어나 "내가 주 앞에 있사오니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옵소서, 주의 사랑을 주의 자비를 내려주시옵소서 " 하는 것이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기자도 하나님 앞에서 낯을 숨기고 싶은 때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보려는 시도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을 품게 된 자신을 한탄하며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어둠더러 이 몸 가려달라고 해도, 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달라고 해보아도 주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나 스올(sheol)이나 바다 끝이나 흑암"은 모두 인간이 숨고 싶은 곳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들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결코 그분에게서 도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의 영적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그리고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반드시 그렇게 숨은 자를 찾아내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붙들어주십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 '코람데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입니다. 우리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신앙인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임재의식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신앙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내 자신의 욕망대로 살려는 생각과 의지를 꿈에서라도 버려야 합니다. 이 땅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주 앞에서 피할 수 없으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 앞에서 도망하거나 피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님께로 돌아서는 일과 주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는 일일 뿐입니다. 범죄했을 때 피하고 숨을 곳을 찾아 해매일 것이 아니라 그 분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난처한 순간에, 곤궁한 일을 만날 때,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 심지어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같은 한계상황에 부딪칠 때, 우리가 해야야 할 일은 주의 낯을 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위기를 수도 없이 겪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주님을 믿고 그 분의 임재의 그늘에서 산다면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전쟁과 전염병, 죽음과 파괴의 화살로부터 주의 손, 주의 오른손이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27편 5절에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이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며"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을 우리가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피하고 숨는 자는 결코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히 낮을 향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로 돌아가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무섭게 달려들고 바람이 강력하게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물결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고, 바람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폭풍우가 몰려오는데도 피곤한 아이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곤히 잠든 것처럼 잠드셨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아버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면 풍랑이 일기 시작하고 바다의 조짐이 나빠지는 가운데에서 고물까지 내려가셔서 잠을 청하셨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그를 그렇게 편히 잠들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무한한 하나님의 신뢰를 따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히키코모리는 '틀어박혀 있다'는 뜻 "은둔형 외톨이"를 일컫는 일본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문제로 부각된 일본의 경우 '취학, 취직을 하지 않고 친구 및 동료들과의 교류 등 사회적 참여를 전혀 하지 않고 집에서 6개월 이상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은둔형 외톨이 숫자는 현재 최소 100만명을 넘은 상황일 것이라고 하며 우리나라도 은둔형 외톨이가 약 40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제도적인 지원과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을 경우 은둔형 외톨이 '100만명 시대'가 곧 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약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은둔형 외톨이거나 그렇게 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며 각종 미디어와 첨단 기기에 빠져 사는 내 자녀들일 수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가 자신들의 소우주로 숨어들어가버리는 동안 가족의 고통도 커집니다. 자신의 가족 중에 운둔형 외톨이가 있는 경우 다른 친척, 가족들에도 이야기할 수도 없고 속으로만 끙끙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은둔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영적문제도 하나님을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은둔하고 싶고 피하고 싶을 때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수 많은 성서의 사람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자나,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그 댓가는 그 만큼 밖에 믿지 못하는 그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숨을 때, 하나님 앞에서 늘 사는 자가 누리는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그 그늘 아래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큰 평안과 큰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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