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본문

인간의 질문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유앙겔리온 2022. 1. 10. 18:22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욥 42:1~6

욥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42: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에 욥이라는 한 신앙적인 인간이 자신이 겪은 고난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질문하는 내용을 참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욥의 마지막 기도와 질문을 통하여서 욥이 품고 있던 혼란스럽던 문제가 일거에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나타난 질문 한 가지 즉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한 이 질문 한 가지만을 살피면서 새해 첫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롭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복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으니 복을 받은 자로서 나름대로 할 일들을 하면서 살려고 했고,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심지어는 아내에게까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는 독설을 들을 지경에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욥2:9을 한 번 보십시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했습니다. 그러했으니 그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욥은 욥기 42장이라는 결코 적지 않는 분량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질문을 토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는 제사도 잘 드리고 잔치를 열고 나면 혹시 내 자녀들이 범죄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그들을 위하여 따로 속죄의 제사를 드릴만큼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에게도 엄격했고,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긍휼을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다는 자기 의로움을 뽑내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했던 만큼 그가 예측하고 기대한 것은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며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리라는 생각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복 대신에 고난이 왔으니 욥은 급기야 "자신의 난 날을 저주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예측 가능한 일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좋은 일도 그렇지만 좋지 않은 일들도 그렇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지적능력과 감성과 영성의 수준을 다 동원하여 이치를 따지면서 말찬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에게서 오가는 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 하는 무수한 말들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말들"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욥의 친구들은 욥이 말하는 것들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서로를 무수히 정죄하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변명하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가 알고 있는 일부분만을 가지고 전부처럼 주장하게 될 때 그것은 이치를 가리는 일이 되고 말아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주게 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과연 그의 친구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다 놓아두고 욥을 선택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과는 달리 결국은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라고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욥는 끝까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 아는 지식도 없이 자신의 한계 밖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교만하게 판단하고 사실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많은 말을 함부로 내뱉음으로써 무지하게도 하나님의 충고, 조언을 가렸던 사실을 자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늘의 이치를 밝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늘의 이치를 가리고 어둡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치를 가리는 자입니까? 이치를 알고 밝히는 자입니까?

  한 시골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목사는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잘 적응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면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몸과 시선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을 좇아 살펴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모습을 보다 궁금해진 목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냥 오래전부터 찬송을 부를 때면 그렇게 방향을 바꾸어 섰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교회를 오래 다닌 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래전 개인 찬송가가 없었을 때 그쪽에 찬송가 가사를 적은 괘도를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때면 그 괘도가 있는 정면 오른쪽 15도 방향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괘도가 사라졌지만 습관은 남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때마다, 이제는 그 괘도가 사라져 빈 벽만 있는 정면 오른쪽 15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관습이, 오래된 전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치를 가리고 있는 이 관습과 전통이 우리를 무섭게 옥죄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이치를 가리고 있는 것들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게 되는 순간"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일을 멈추었을 때였습니다. 3절 중반절 이하에 보면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무지한 말로 이치에 거스리는 말을 한 것들을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했습니다. 

  사람이 속이 뒤집어지고 감정이 날카로워지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뜻없이 발성기관을 통해서 울리는 소리를 내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닫힌 욥의 마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심으로 인해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려하는 이가 욥를 찾아와 위로하고 권고한 세 친구들도 아니고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욥 자신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루는 새 한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무거운 날개를 두개씩이나 양어깨에 매달아놓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네가 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두 날개 때문이란다" 우리는 하늘 날기를 원하면서도 무거운 날개는 불쾌하게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일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한 해도 예측가능한 것보다 예측 불가능한 것이 더 많은 한 해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귀로 드기만 하여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려고 하는 이들이 아니라 영안을 열어 보게 되기까지 되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찬송하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