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느 때까지니이까? 본문

인간의 질문

어느 때까지니이까?

유앙겔리온 2022. 1. 4. 17:28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 13:1~6

시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오늘 본문은 네 번의 "어느 때까지니이까?"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했습니다. 

  왜 이런 장탄식이 쏱아져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환난 자체도 달갑지 않는데, 짧으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난처한 상황이 장기화 되어가는 가운데 나오는 탄식의 외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항한 인간의 "어느 때가지니이까?"하는 외침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그렇다면 성경 밖의 상황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오랫동안 계속되는 고통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의 즉각적인 해답과 신속한 해결책을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우리의 뜻대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장기간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해하며 당황해 합니다. 지나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자포자기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 가운데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그분의 자녀들을 잘 이해하십니다. 

  어떤 좋지 않은 사태이든지 장기화하는 가운데 놓이게 되면 누구라도 "어느 때까지니이까?"하고,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으면서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사스나 메리스 때와 같이 잠깐이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코로나 사태는 진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이런 상태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장기화된 상황을 타개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만을 개발하고자 잔꾀를 쓰는 데 집중했던가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시편기자는 진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만 되어가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럽건데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만해주신다면 고난이 길어지는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소돔을 엎으시는 중에서 롯과 그 가족을 내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셔서 요셉을 잉태케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에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세를 생각하사 뜻을 돌이키신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생각하사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는 "나를 생각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낙망하기 쉬운 환난 가운데서 자칫 하나님을 향하는 눈이 어두워질까 염려해서 끝가지 하나님을 찾는 눈을 밝혀주시옵소서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반전의 미학이 잘 나타난 본문입니다. 처음 시작은 의심과 불만과 탄식과 통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탄식과 통곡이 갑작스럽게 찬양과 기쁨으로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짖어 기도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거침없이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기자가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기나긴 나쁜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장기간 나쁜 상황이 떠나지 아니함으로 의심과 불안과 불만과 슬픔과 탄식과 고통에 떨어져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내가 그렇게 흔들릴 때 내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길어지는 것쯤은 참아 낼 수 있지만 이것을 통하여 내가 사망의 잠을 자게 된다면, 그리고 원수와 대적자가 악을 행하는데 힘을 얻도록해주는 것이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임한 고난으로 인해서 이런 일까지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 아닙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고 싶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의 날을 길게 해서 고통을 더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환난이 길어지는 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의 문제를 여호와께 맡길 때 기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하나님께서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시작은 의심으로 시작했을지라도 곧 확신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작은 탄식과 통곡으로 시작했을지라도 곧 기쁨과 찬송으로 바뀔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도하는 자와 그를 의뢰하는 자를 반드시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결코 짧지 않는 고난을 주시지만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는 시간이 너무 들어가서 못쓰게 될 정도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길어지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불안감에 떨거나 불신앙하지 말고 더욱 기도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욱 의지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