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나는 누구이오며?(삼하 7:18~22) 본문
나는 누구이오며?
삼하 7:18~22
삼하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7: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삼하7: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삼하7: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삼하7: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오늘 주어진 본문 말씀은 다윗의 기도 중에 일부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끄는 "나는 누구이오며"라는 다윗이 하나님께 질문한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일개 양치기 집안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막내둥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나 형제들 조차도 그가 유력한 자라고 눈여겨보이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울왕에게 발탁 되었으나 오히려 그때부터 혹독한 시련이 기간이 되었습니다. 사울왕의 미움을 사서 이 국경 저 국경으로, 이 산지 저 산지로, 암혈과 토굴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던 그가 유다의 왕에 이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부스를 점령해서 자신의 수도로 삼았고 블레셋 등의 외적들을 물리치고 복속시켰습니다. 그의 영토도 넓어졌고 왕권은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셨습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거반 다 이루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내가 한 것 같고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꾸며진 자기를 자신으로 착각하고 기고만장합니다. 꼴불견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이것에 감염되면 이웃을 멸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경멸하게 됩니다. 자신을 과대 평가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일국의 왕으로 공사다망할텐데도 불구하고 먼저 하나님께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그곳에 머물면서 기도했습니다.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했습니다.
다윗의 이와같은 질문은 역대상 17:16~17절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 집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이러한 다윗의 질문에는 자기 작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카톤' 곧 '막내, 작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다윗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자기를 막내, 작은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겼을 때 그는 하나님을 첫 번째, 큰 분, 중요하신 분으로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마음이 오늘 이 짧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주(아도나이)"라고 11번이나 계속해서 부르고 있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최고로 칭찬해주셨고 그렇게 대해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알면 철저하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알면 철저하게 또한 자기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서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삶은 나를 모르는 삶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무한하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이 언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거할 처소인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시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계시로 주신 "다윗과 다윗의 자손들과 그 집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었을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작 바로 앞절인 17절을 보면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이 말씀에 대한 반응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 기록된 다윗의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는 누구이오며, 했던 질문은 정작 나를 모르겠다 싶어서 나온 의문의 속한 질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온 감사와 감격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어쩌면 질문이라기보다는 감탄사와 같은 의미이며 감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다윗은 지금 하나님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다윗처럼 내가 누구이며 내 집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면 언제나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도 없고 감격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그저 사니까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다 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은 모든 종류의 분쟁, 시기, 짜증을 유발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되지 않습니까? 하루를 살더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이오며, 내 집이 무엇이관대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였나이까?"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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