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렘 16:19~21) 본문

인간의 질문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렘 16:19~21)

유앙겔리온 2022. 3. 5. 03:42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렘 16:19~21

렘16: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렘16: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렘16: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받아 일하던 시대에 유다공동체의 문제가 무엇이었느냐?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느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이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고,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러고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또한 이들을 깨우쳐야 할 선지자는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고 백성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악을 좋게 여겼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하였고,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떠나 물러가고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여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형제국가인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고, 남 유다 마져도 바벨론의 위협으로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는 이방민족(애굽)을 의지하며 거짓 예배와 우상숭배를 여전히 일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다공동체를 위해서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세우신 선지자인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또는 "여호와께서 높이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빈틈없으신 하나님의 일하심의 일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공동체에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시고 보내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을 바벨론에 붙히셨다가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을 선포케해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서 하나님을 경외케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유다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참 하나님이고, 그 분이 만군의 여호와이며, 그의 손과 능력으로 바다의 한계를 정하시고, 해를 낮의 빛으로 주시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신 분이시며,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명철로 하늘들을 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의 선지자가 된 것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만 신으로 섬기라고 외치니 온갖 비난과 조롱을 면치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이들이 가득한 가운데 그들의 믿음이 틀렸다고 말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일상 가운데서 그들로 인한 압제가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울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가운데서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본문 19절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하나님은 나의 '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즈'는 '힘, 능력, 세력, 권능'의 의미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요새'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오즈'는 '안전한 장소나 방편, 보호'를 뜻합니다. 또한 '피난처'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노스'는 '도망, 피함, 피난처'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로 자신을 해하려는 세력과 사람들로 부터 도망하여 그 원수들이 이를 수 없는 안전한 곳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아닌 것을 신으로 삼는 것들, 그래서 의지하고 피하고 찾아들어간 것들은 실로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에서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선지자 노릇하면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레미야는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탄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특히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그릇된 안도감에 사로잡혀 예레미야가 전한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유다는 멸망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이 파괴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의 현실을 온몸으로 함께 하며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러지게 되었으며(렘9;1) 성경의 예언자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신 아닌 것을 신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들을 딱하게 여겼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돌이나 쇠나 나무로 만든 것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는 이들을 보면 참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만 딱한 것일까요? 예레미야시대의 유다백성들처럼 송아지와 담무스와 레판의 별은 섬기지 않겠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신뢰하고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일이든, 자녀든, 자신이든, 또한 그것이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민족주의든, 들은 것이든 배운 것이든 간에,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다면, 그것은 "신 아닌 것을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 딱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으로 믿고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때마다 일마다 시대마다 새로운 얼굴로 등장하는 우상, 거짓 신과 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엔 우상이라고 하면 형상화된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것들 가지고 있으면 유용한 것들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믿는지, 아니면 신 아닌 것을 신으로 믿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중요한 일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결정하는 지 다른 것 중심으로 결정하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은 바로 이처럼 예레미야 때와 같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안정과 평안을 바라고 그 안정과 평안이 유지되는 동안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줄 잊어버리고 주신 것에 메달려 그것을 신처럼 떠받들고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것들은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자들에게 21절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모든 것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그들은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반듯이 끝까지 찾아가셔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