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출 33:12~17) 본문

인간의 질문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출 33:12~17)

유앙겔리온 2021. 9. 29. 13:27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출 33:12~17

출33: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출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33: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출33: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아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아론을 움직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고 그 신 앞에서 광란의 몸부림으로 축제를 벌렸습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된 사건 이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뚜렷한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 우상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을 떠나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리리라 한 땅으로 올라가라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으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3절)하셨습니다. 가나안땅을 얻게는 해주겠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올라가시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별로 충격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간다는데 다른 것은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획득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야 있건말건 상관없이 짐을 싸들고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여 들어가면 그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신앙의 가벼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없이는 한걸음도 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 때까지 간구하고 또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지 않으시면 결코 길을 나서지 않겠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말한 "이곳"은 과연 어디입니까? 그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역경의 장소요, 재미도 없고 안락함도 없는 장소입니다. 그저 날마다 힘들게 살아가는 곳입니다. 사막에는 정원도 없고, 자연자원, 안전, 일터도 없습니다. 집, 강, 포도원, 과수원, 쇼핑, 오락, 유흥 등등 아무것도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오직 외딴 곳의 황무함만이 있습니다. 전혀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모세는 꿈에도 소원이었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보다는 비록 불편하기 짝이 없고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만 있다면 광야에 머무르겠습니다."한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이라는 미래의 축복보다도 더 소중한 것, 즉 현재, 지금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원했습니다. 

  사자를 보내시는 것도, 대적을 쫓아내시고 땅을 주시는 것도,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시는 것도 기막힌 기적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우리를 올려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이루지 아니한 꿈은 헛된 것이며 그 결과가 볼품없고 초라할 것을 알았습니다. 꿈을 이루고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므로 인해서 그 이룬 꿈마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고 벗어나는 것을 바라시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바라고 갈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은총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인간의 호기로움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간구하는 상함 심령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유독 "은총"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온 것도 주께 은총을 입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하신 지금에야 더욱 모세가 원했던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하고 질문합니다. 그리고서는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주의 백성이 되는 것, 천하 만민 중에 구별된 백성으로 삼는 것,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풍요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 아닌 이들과의 구별점,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심이라고 모세는 고백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없는 출발은 곧 파멸의 길임을 알았으며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참된 평안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더 소중히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 14절"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쉬게 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쉬게 하리라는 말씀은 편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17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태도에 달려 있고 태도는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결단은 가치에 좌우되며 가치는 신앙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일생을 변화시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신앙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시는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 없이 가안땅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를 더 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알 수 있게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런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마침내 원하는 곳에 이른다할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침내 취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시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 은총이며,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 세상 천하만민들과 구별하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