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출 17:1~7) 본문

인간의 질문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출 17:1~7)

유앙겔리온 2021. 9. 23. 15:53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출 17:1~7

출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출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신광야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르비딤이라는 곳으로 옮겨 그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 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아 르비딤에 도착하여 장막을 쳤는데 그곳에는 그들이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르비딤란 지명의 뜻은 "원기회복"입니다. 그런데 원기를 회복한다는 지명에 이르렀을 때 무엇이 없었습니까? 바로 하필이면 물이 없었습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원기회복"이란 지명을 사용했으면 분명히 그곳에 이르면 원기가 회복된다는 의미일텐데 말입니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일텐데 그 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원기회복은 커녕 물을 마시지 못해서 다툼이 일어날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그곳에는 물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르비딤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해서였지 그곳은 과연 원기회복의 장소였음을 뒤 늦게 알게 됩니다. 반석이 덮인 그 속에는 풍성한 샘물이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반석이 덮여있어서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없는 것이 아니라 덮여있는 것입니다. 덮여 있는 것을 탐수해야 하는데 그저 고인물이나 흐르는 물을 주어먹기를 바란 것입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는 르비딤에서 그들의 고질병이 또 발동합니다. 이 고질병은 재발도 잘합니다. "모세와 다투어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2~3절)했습니다. 

  백성들의 행위는 배은망덕한 행위로써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려 모세로 하여금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표현중에 하나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을 목말라 죽게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가져야할 주인의식과 역사의식을 잃어버리고 노예의식에 붙잡혀 있고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르비딤이 지역의 표면에 물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하신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항상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원망과 불평부터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내부적으로 다투는 일로 허송세월을 합니다. 그래서 생긴 지명이 둘인데 하나는 '맛사'라는 말인데 "시험'또는 "유혹"이란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므리바'라는 말인데 "다툼" 또는 "논쟁"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의 눈빛에서 광기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광기는 공격의 표적을 찾게 마련이고, 그 첫 번째 표적이 자신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4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그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수 많은 난관에 직면합니다. 그들에게 들은 원망이 음식이었다면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럴 때마다 인간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에 앞서 항상 이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맡기고 의뢰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응답해주셨습니다. 모세야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5~6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샘물을 내서 먹여주셨고 그곳에서 원기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사막이고 우리가 머무는 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을 샘의 원천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가 목이 말라 죽게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보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눈도 열어 샘을 보게 해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견디면 그 곤고한 기회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줄로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능을 여러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번에도 물 앞에서 소동을 벌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은혜되지 않는 일에 소동의 당사자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을 소동하는 장소로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성도 여러분! 자연적으로 환경적으로 지정학적으로 공급이 끊길 때 원망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이 때에야 말로 하나님의 공급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 없이 르비딤의 기갈을 이 세상 사는 날 동안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르비딤의 백성들을 생각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신구약 성경은 각각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히 3:8~11에 보면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하셨고, 구약 시편 95편 8절에서 "므리바에서와 같이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리비딤을 만날 때마다 그곳을 므리바와 맛사로 만들지 말고 그곳에서 물을 찾기 위한 수고를 하고 그래도 찾지 못했을 때 우리가 찾을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르비딤으로 인도하셨다면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이미 준비해놓으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