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출 3:13~14) 본문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출 3:13~14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양치기를 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종된 애굽에서 인도해 내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생각할 때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군데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며, 나는 그들에게 아무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따르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는 것이 훨씬 더 잘한 일이 아니시겠습니까? 내가 아닌 보낼만 한 자를 보내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스스로 생각할 때, 별볼일 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내가 너를 보내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서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고 하라"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가 애굽에 갈 때 너를 혼자 보내지 않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으나 그는 여전히 걱정근심이 많았고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정령 너와 함께 있으리라"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의 직분, 나의 인격, 나의 힘이 문제 될 것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놓고도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하나님만 믿고 가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다시 타협을 시도합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순종하여 가기는 가겠습니다만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던질 질문을 가정해서 다시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모세가 왜 이와 같은 추측성 질문을 했겠습니까?
모세가 바로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핑계삼아서 "그들이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했습니다만,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것을 물을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왕도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바로라는 이름을 빌어 묻고 있는 것일뿐 어쩌면 자신 스스로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모세 자신에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모세 자신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불러서 출애굽의 사역을 맡겨 애굽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모세가 넘어야할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어떻게 잘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근본이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양을 갖추고, 전문 지식을 쌓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어떤 능력을 갖추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하고 합당한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가 아니라 어떤 하나님이 보내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잘 알기만 해도 무슨 문제든지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살이 하고 있는 애굽은 다신교의 나라입니다. 수많은 신들이 각자 이름을 가지고 애굽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곳에서 430년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애굽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그릇 알고 있었고 모르고 있을게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 하나님이 누구냐?"고 질문할게 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보낸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과는 어떻게 비교도 되지 않는 신인지 말하라"할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아니라 모세 자신도 이런 질문이 마음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서 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이 질문을 들으시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자기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나는 나다" 즉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란 뜻입니다. 피조된 분이 아니시니 하나님은 누가 있다 해서 있고, 없다 해서 없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 나오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곧 하나님의 속성을 잘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시지 결코 인간의 조각이 주물이나 생각으로 빚어만든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하시고 스스로 있는 자 되는 나만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의 하나님은 대등한 자, 마주할 자가 없는 분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쓰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름은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도 정확히 알면 그분의 존재와 함께 속성을 알게 됩니다.
애굽의 신들이 갖고 있는 이름은 전부 인간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라고 명하심을 받을 때 그 일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우리의 결점이나 약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충분하심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자존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 만큼 그 어떤 인생이나 환경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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