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2~33) 본문

인간의 질문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2~33)

유앙겔리온 2021. 8. 29. 12:52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2~33

창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창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18: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죄악이 관영한 땅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을 알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점점 더 악해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악인의 꾀를 좇아 걸어갔고, 죄인의 길에 섰고, 오만한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시 1:1절에서 분명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그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미리 알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은밀한 정보를 듣고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가 그럴줄 알았습니다. 일낼줄 일았다니까요. 죄를 지었으면 그 댓가를 치뤄야지요. 잘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그러기를 기대하셨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에 소위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중보기도'란 것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믿음이 있어서 인류애를 가지고 중보기도를 했다기보다는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명확하게 그 내용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그렇습니다. 큰 명분이 있던 없던 간에 소돔과 고모라가 저대로 가다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받을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성안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 롯의 가정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그가 한 일은 중보기도를 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려 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나아와'에 사용된 '니가쉬'는 가까이 나아가다, 접근하다라는 의미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서 있던 자리에서 더 가까이 하나님께 접근했습니다.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생각에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만약 소돔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그 곳을 멸하실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그것은 부당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까?"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반드시 구분하셔야 하고 악인을 벌할 때 의인이 잘못되는 일이 있서는 안된다는 생각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어찌 아브라함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와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한 이 질문은 인간 역사만큼이 오래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빈틈이 없이, 실수하지 않고 일처리를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눈에 비치는 것은 그렇지 않게 보일 때가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었고 이런 질문을 거침없이 하기도 했었습니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고난에 빠지고 특히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환난을 당할 때, 오히려 악인은 건재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의문을 품고 하나님께 거칠게 항거하고 모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판단이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우리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입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대로 라면 아마도 세상은 벌써 수십번 뒤집어지고 남았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점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대로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입을 떼셔서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하셨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어서였는지, 아브라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숫자를 조금씩 낮추면서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묻기를 계속합니다. 

  "하나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그래도 감히 이 미천한 존재인 제가 주님께 아뢰나이다"라며, 처음에는 50에서 5을 감한 45명을, 이어서 40명의 의인을 찾으신다면 어찌하시협니까? 30명-20명-10명으로 계속해서 그 인원을 줄여가면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찮다 하거나 왜 그런 철부지 같은 질문을 하느냐, 화내지 않으시고서는 그 남은 의인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적어도 그 큰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10명쯤은 족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 않는가 싶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의인 10명에서 멈춥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다 들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 길을 가셨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그 많던 아브라함의 질문들도 다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아브라함은 이러한 중보기도에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조카 롯과 그 가족을 그 심판 가운데서 살리십니다. 이것이 간증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지나간 고대의 유물뿐이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전형적인 세상의 상징이며,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가 좇고 서고 앉아 있는 우리가 얽혀 살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브라함의 때에 있다가 사라진 성이라고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오늘날의 세상은 옛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하고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소돔과 고모라는 이미 일회적으로 지나간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 이 시대에 우리가 속하여 있고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언제나 모든 말씀이 지금 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로 기록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만을 탓하고 정죄하고 나는 저들과 달라 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브라함되어 이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