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내가 누구이기에?(출 3:9~12) 본문
내가 누구이기에?
출 3:9~12
출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양치기 모세를 불러 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셨을 때, 모세의 반응은 시쿤둥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갈 수 있으며 내가 누구이기에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다시 말해서 "내가 뭔데 그런 일을 합니까?"하고 반문한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모세의 이 질문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내가 누구냐?"입니다. 이 답만 얻을 수 있다면 사실 인생 게임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해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고, 질문을 던져 보지만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다가 갑니다. 모세도 바로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80년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질문이 터져 나온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실 때였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이 말에 모세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전 지금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난 받고 있는 애굽에 있는 백성들과 함께 산 사람도 아니고 도망자 신세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양치기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는 모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져서 완전한 실패자처럼 보였을 때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늙은 양치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양들의 오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정치적인 감각은 무딜대로 무더진 초라하고 초췌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늙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뭐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나머지 하나님의 능력은 보지 못하고 자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로 강하게 쓰십니다. 미련한 자로도 능히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는데 쓰십니다. 가난한 자로도 부한자를 부끄럽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중에 괴수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이스라엘이 잠잠하면 돌들로도 소리지르게 하실 수 있으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어깨에 반짝이는 견장을 달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병거를 타고 애굽의 중요 도시를 달릴 때 그를 부르시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 샘곁에서 십보라를 만나 장인 이드로 집에 들어가 40년 동안 삭히시고 익히고 늙히셔서, 완전히 힘이 빠진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으로 부르셔서, 그의 신을 벗게 하셨고 출애굽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자신를 판단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가 누구인가?"하는 것은 아주 수월하고 명쾌하게 풀릴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시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뭐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는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누군 누구야! 하나님이 함꼐 하신 사람이지" 하나님께서는 "너의 정체성을 네 안에서 찾지 마라.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정체성을 환경을 통해서도 찾지 말거라. 환경 자체는 자꾸 바뀌는 것 아니냐?"하신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누구인가, 또 그가 어떤 존재인가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와 함께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알고자 하고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중요하단다. 그걸 깨달아야 네가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함께 하시지 않으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많은 사람들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사람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셨습니다. 그림을 그려주시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산이 네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나를 섬기는 산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가 될 것이라"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의 왕자일 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을 때, 그리고 애굽의 모든 학문을 익히고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따를 때 그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팔십의 늙은 양치기를 부르셔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할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초라한 늙은 양치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누구보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팔십이 되도록 자기 양 한 마리도 없는 무능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처럼 "내가 누구이기에" 곧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낮아질 때 그를 '소명'하셨습니다. 오히려 너라면 되었다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밤길을 갈 때 등에 어린아이를 업고 가도 한결 든든하다는 여인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함께 해 주신다면 든든한 것 뿐이겠습니까? 겁낼 것이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괜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고 하나님이 나를 홀로 두시는 것을 근심하셔야 합니다. 그런 삶에 자신이 던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나 자신 혹은 환경에 의해 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나 자신을 규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역할보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차지하시는 분량이 훨씬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조차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셨습니다. 함께 하신단 약속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게 하신 증거까지 주신다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을 일을 감당해 나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자격들과 내 낯을 세워줄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데?'라고 하면서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 일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겠습니다. 하는 응답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나로서는 도저히 안되는 것 아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만이 희망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인해서 교회가 발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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