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 들으리이까?(출 6:10~13) 본문
어찌 들으리이까?
출 6:10~13
출6: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출6: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출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 6: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애굽에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때 애굽에서 바로의 귀빈이었던 야곱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바로는 잠시 귀빈으로 온 그들을 잡아두고 영구히 노예화할 방도를 모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찾아주시려고 직접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할 하나님의 동역자로 모세를 선택하시고 그를 연단하신 후에 능력을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보았던 것처럼 모세의 첫번째 출애굽 사역은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사명에 실패하고서는 지치고 낙심된 모세가 어깨가 축 처져서는 하나님께 나아와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받도록 하시느냐고, 왜 나를 보내셨느냐?고 항변하던 모세가 우리의 눈에 선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서는 의기양양하게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탄식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와 탄식하며 질문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답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그러하시고서는 느닷없이 난데없이, 훅 들어오서셔 모세에게 다시 한 번 사명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 보내게 하라"(10~11절)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주신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어찌 들으리이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말씀하신 후 다시 6:28~30절에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겪은 첫번째 사명의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모세가 전한 말씀 앞에서 바로는 거들먹거리며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잘 잘 하라"했고, 그가 구하고자 했던 백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더 세고 강한 노역이었고 학대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해방을 받기는 커녕 도리어 학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서 그나마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백성들은 실망하고 원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입장에서는 바로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다시 서서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실패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그들에게로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명하셨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말문이 막힌 것입니다. 지금 적어도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에게 가서 그분의 말씀을 다시 전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크 이쉐마니' 어찌 경청할까? 어찌 순종할까?라는 뜻이며 '아렐 세페트' 포피를 가지고 있는, 할례받지 않은, 즉 할례받지 못한 입술이라는 뜻입니다. 내 눈에도 위대하게 보이는 바로가 어찌 할레받지 못한 내 무능한 입술의 요구를 들어주겠습니까? 하는 인간적인 의구심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되었으나 여전히 모세의 전략은 하나님께 속한 것보다는 자신의 환경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변덕스럽고 강팍한 바로를 바라보고, 고난 없는 영광을 기대한 원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보고, 주변과 환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천한 신분과 무능한 입술과 자신의 동족조차도 설득하지 못한 실패의 경험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입술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이와 같은 질문은, 그가 하나님의 권능보다는 자신의 약점에 과도히 치중하고 있음으로 나온 질문입니다. 모세는 아직도 자신의 말 재주가 바로를 설득할 수 없다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아직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위하여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꺼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 수행에 용기 없던 모세와 아론을 기어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역에 끌어들이고 사용하시기 이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확증을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와 아론의 족보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모세와 아론의 족보는 모세와 아론이 해야하는 일은 이미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며 이제 그 일을 이루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너희 능력에 달려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시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 은혜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족보 이야기가 출현하는 것은 강요된 은총으로써 거부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전폭적인 주권과 통치에 속한 일이라는 것이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그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라는데 더 이상 무슨 이유나 설명이 필요합니까? 그가 무슨 짓을 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상벌 간의 그 최종 책임과 결과를 그 보호자와 가장인 하나님이 모두다 담당하고 해결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성경의 족보가 갖는 본 뜻입니다. 모세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한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다시 바로 앞에 설 자신이 없었지만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그가 바로이든 누구이든 게의치 말고 제자로 삼아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며 고운 옷 입은 자들도 아니며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으로써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어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능수능란한 기능이나 재주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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