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10) 본문

인간의 질문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10)

유앙겔리온 2021. 7. 14. 15:35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 4:9~10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이 시기심과 비교의식에 빠져서 아우 아벨을 처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가인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아우 아벨'의 안부를 물으시고 찾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다는 것을 모르고서 물으신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다 아시면서 물으신 것은 가인이 아벨에 대해 감당해야하는 아름다운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불구하고 가인은 마치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소리쳐 반문했습니다. '왜 내가 내 동생을 지켜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 소명을 누가 주셨습니까? 아벨을 지켜야 한다면 오히려 제가 아닌 당신이 그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가인은 형으로서 마땅히 동생 아벨을 돌보며 지켜주어야 할 인간적인 책임을 가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면 영적인 측면에서도 동생 아벨을 모른채 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면서 아주 뻔뻔하게 형제간의 관계성 단절 뿐 아니라 하나님도 자신의 안중에 없음을 선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돌보고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해야 할 본분입니다. 그런데 가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면서 그 본분과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이에게 떠넘겨 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리고 말세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는 정신이 가득한 아찔한 세상입니다. 이 정신이 가득하면 사람 살기가 점점 힘든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동생에 대한 책임회피를 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나는 나고 아벨은 아벨이지 내가 아벨을 꼭 지켜야 할 책임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가인에게 아벨을 지켜야 하고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형제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인은 아벨을 돌보기는 커녕 그를 쳐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는 커녕, 연약한 자를 착취하고,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저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지키는 자"로 번역된 '솨마르'의 본래 의미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 치다', 즉 '지키다' '보호하다', '시중들다'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는 곳(2:15)에 처음 등장하는 이 용어는 성경에서 아우뿐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지켜 보호해야 한다는 창조적 임무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하여금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면서 그 동산을 '지키도록'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내가 에덴동산을 지키는 감시원입니까?' 하는 책임회피를 했고, '지키라'하신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지켜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데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인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켜야 하는 관계를 깨고서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면서 책임을 외면했습니다. 회개치 않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사랑해야 할 형이었습니다. 동생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였습니다만은 이와 정반대의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생을 지켜야 할 소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한 세상속에서 다른 사람을 지키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인의 이기적 질투와 분노는 주님이 명하신 최초의 임무 가운데 하나인 이웃을 살펴 보호함에 대한 거부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고자 그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을 때, "내가 저 인간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반문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그는 "내가 저들을 지켜야 하는 자입니다." 하시고,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마 8:17). 그리고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고, 피를 흘려주셨고, 죽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당연히 '우리가 자연을 지키고, 형제를 지키고 세상을 지키는 자입니다.' 고백하고 그 책임을 다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자연 앞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과 자연을 지키고 풍성케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죄가 모든 관계들을 단절시켜서 가인처럼 선언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할지라도 관계회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롬 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주의 깊게 살펴 섬기는 자가 바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우 아벨을 지키고 돌보라고 형으로 세우셨는데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면서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벨의 희생 당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죽음을 아셨고, 아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인에게서 아벨을 찾으십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일깨우려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네 아우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를 지키고 돌보라고 우리에게 소명을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아벨은 누구입니까? 아우 아벨과 같은 사람을 지키고 돌보는 일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의가 좀 상했다고, 좀 다투었다고, 이해득실이 생겼다고 하나님께서 돌보고 지키라고 붙여주신 아벨과 같은 아우를 외면하면 안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잘 감당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