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1~11) 본문

하나님의 질문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1~11)

유앙겔리온 2021. 4. 17. 21:3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1~11

욘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욘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욘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욘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욘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욘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욘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받았고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에게 삼킴을 받아 그 뱃속에서 3일동안 갇혀 있는 일을 걲고서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니느웨로 간 요나는 3일 길이 걸릴 니느웨 큰 성읍을 하루만 외치고 나서 니느웨가 자기가 예언하여 외친대로 멸망받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설렁설렁 대충 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가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재와 티끌을 둘러쓰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니느웨를 사"하셨습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하나님께는 한 없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 사건이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불평은 오늘 본문에 요나가 성냈다고 기록하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했고, 그렇게 싫어하고 성낸 이유를 설명하기를 "내가 이러니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와 니느웨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시면서 내가 가서 하나님의 재앙을 니느웨에 선포하면 그들이 회개를 하게 될 것이고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용서를 배풀어주실 것이 이렇게 확연한 것임을 내가 모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니느웨를 잘 되게 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으로써 쪽팔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신의 의지를 꺾고  니느웨에 가서 40일만 지나면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했것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심으로 인해서 요나의 예언은 거짓으로 판명 남으로써 요나는 선지자로서 자신의 위신이 실추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심판 선언을 하고 나서 그 성이 정말로 멸망하는지 초막을 짓고 살펴보았지만, 오히려 그 성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철회되자 불평을 쏟았던 것입니다. 이러실 바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인해서 요나는 성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왜 요나는 성냈던 것입니까? 그것은 요나의 생각에 니느웨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적대 국가인 니느웨에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한 왜곡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불만이고 성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나만의 이야기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용서받지 못하고 죽어야 할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결코 어떤 경우에도 용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니느웨처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면 우리도 요나처럼 매우 싫어하고 성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씨가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전도사가 되었고 곧 안수를 받게 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아마 광주시민이면 다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식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두번에 걸쳐서 진중하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성냄이 옳으냐?"하셨습니다. 너의 성냄이 옳다면 결코 내가 너에게 따져 묻지 않겠다는 뜻이며 내가 네 편에 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면 네가 그렇게 성내서는 안될 것이며 나의 기쁨을 요나 너의 기쁨으로 여겨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냄을 무조건 비판하고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성을 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덜 성을 내고 어떤 사람은 성을 더 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누구나 성을 내는 일을 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정서를 분석한다면 그는 화쟁이 입니다. 화가 짠뜩 나 있는 상태에 있는 요나를 요나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요나의 성냄은 그의 마음속에 잠재해있던 니느웨에 대한 증오가 폭발한 것일 겁니다.

  "성을 낸다"는 뜻의 헬라 원문 '파록수네타이'는 원어적으로 분석해 보면 '파라'라고 하는 말은 '곁에'란 말이고, '옥수네타이'는 '날카롭고 뾰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해 날카롭고 뽀쪽하게 찌르는 마음 상태를 두고 "성낸다"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사람은 성내는 것을 통해서는 가까이 있는 것들, 곁에 있는 것들이 날카롭게 찌르는 것에 의해서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성을 내는 것입니다. 즉 내 남편, 내 아내, 자녀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에게 성을 잘 내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들에게 사랑이 아닌 미움의 특징인 성을 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4절) 그래도 자신이 성내는 것이 옳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혹시나 하나님이 니느웨에 불을 내려 심판하시지 않을까 하여 초막을 짓고 보고 있었는데, 햇볕이 강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이 지게 해 주시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셔서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심으로 박넝쿨이 시들어 그늘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분노하며 또 다시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절) 그 때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9~11절) 그리고 말이 없습니다. 

  요나서는 여기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번째 질문 앞에서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한 것처럼 요나도 내가 성내는 것이 옳지 못했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나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넝쿨을 아꼈듯이 하나님이 극악한 백성 니느웨 백성도 아끼셨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찌 아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지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드러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당연히 벌 받아야 하고 당연히 죽어야 할 자라고 판단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죽이기로 정하신 것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시 102:20~2에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될 자라고 판단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고, 그래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고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내는 것이 항상 또는 반드시 죄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냄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을 야수처럼, 맹수처럼, 정신없는 사람처럼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반드시 자신에게 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함은 우리의 성내는 것이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되며 정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휠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