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본문
누가 알겠느냐?
욜 2:12~14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요엘서는 유다 제8대 왕 요아스 왕 때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범죄한 유다백성들에게 임할 무서운 징계에 대해 유다백성들이 그것을 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1:4절에 보는대로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한 것이 임할 것이라 한 것입니다.
4번이나 반복된 재앙이란 어떤의미입니까? 완전한 재앙이라는 것이며 극심한 재앙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날을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호와의 날에는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조차도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질 것"(1:16)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예고와 경고를 하면서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임박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미 활시위에서 화살이 떠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유다의 죄악이 최고조에 달했기에 이제라도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만약 이제라도 이 경고를 듣고 돌이키면 이 문제는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 중에 "누가 알겠느냐?"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알겠느냐?"하신 이 반어적 질문은 불확실성이나 의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나타낼 때 사용된 어법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뿐, 하나님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르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알겠느냐? 하는 하나님의 이 반어적 질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해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한 것이며 이 질문을 받는 이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확인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시고 깊으신 은혜와 사랑을 감히 누가 다 안다하겠습니까? 단지 놀라울 뿐이십니다.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 심각한 재앙을 두려워 하면서 벌벌 떨고 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를 받는 날 바로 그 날 그 즉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하는 자리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떠난 사명의 자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자리로 늦었다고 하지 말고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와야 할 이유는 아주 명료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서 방탕하다가 "이제는 내 발길을 돌려서 나의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라고 할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다가 있는 것을 다 허비하고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내 아버지 집은 일꾼이 얼마나 많으며 아버지 집의 가장 최악의 것이라도 이보다는 더 나으니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래"한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돌아올 때,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하십니다.
돌아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정도가 중요합니다. 이전에 한두번 해봤던 단지 생각과 말로만이 아닌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해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옷을 찢는 것 말고 형식적으로 전통적으로 받고 마는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하듯(신 10:16, 30:6, 롬 2:28,29)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옴이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회전목마처럼 반복회전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돌아옴의 그 방향성은 포로가 해방을 받고 "돌아옴"으로 그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전환된 것처럼 그렇게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돌아온 곳으로 되돌릴 수 없는 돌아옴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의 말씀에 아주 강하고 뚜렷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들어간다"(마태 7:21)하셨습니다. 주여 주여의 돌아옴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돌아옴이 필요합니다.
그리하면 ".......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을 때 개인의 역사속에서나,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와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역사나 나라와 민족의 역사나 그 시대 역사 가운데 "재앙이 아닌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욜 2:28~29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있는가?" 정말로 용서는 이루어지는 것이고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인가? 라고 묻게 됩니다. 거기에는 대해서 성서의 답변은 여전히 "누가 알겠느냐?"일 뿐이다. 우리의 현실에 대한 모든 종교적, 철학적, 신학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유일한 대답은 바로 이것 "누가 알겠느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일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지, 아니실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때 형식적으로 옷만 찢지 말고 진심으로 마음을 찢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의 날은 재앙의 날이 아니라 축복으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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