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너를 놓겠느냐?(호세아 11:8~12) 본문
너를 놓겠느냐?
호세아 11:8~12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11: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호11: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11: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서도 북왕국 마지막 선지자였던 호세아 선지자와 그의 음탕한 아내 고멜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인 호세아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 앞에 감동받게 하고 그러한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음탕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의 고멜 사랑은 호세아가 손해보는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호세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은 늘 진정으로 사랑하는 쪽이 손해를 봅니다. 사랑하는 쪽이 주고 참고 희생하며 용서합니다. 그래서 참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2008년 5월 쓰촨성 대지진 당시 보도되었던 기사 하나가 있는데, 지진이 있던 다음날 구조 작업이 한창이던 군인과 구조대원들이 폐허 속에서 이상한 무언가를 발견해 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시체였습니다. 구조대원들이 발견했을 때 이미 그녀는 죽어있었습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집은 이미 주변과 함께 폐허가 되어있었고, 폐허 더미 속의 작은 구멍으로만 그녀가 죽었다는 걸 겨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무릎을 나란히 꿇고 있었고, 몸은 앞으로 숙이고 있어 마치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단지 몸이 약간 휘어져있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구조대원들이 손을 내밀고 소리를 질러 깨워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조대원들은 다음 건물로 옮겨가려던 중 구조대장이 갑자기 다시 그 장소로 뛰어가며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가 죽은 그녀의 시체 앞으로 돌아와 힘들게 손을 집어넣어 여자 몸 아래에서 무언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있어, 아기가 있어, 아직 살아있어." 오랜 시간의 구조 끝에 구조대원들은 그녀 시체 앞에 누워있던 아이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아기는 노란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붉은색 작은 천이 입혀져 있었고, 대략 3~4개월 정도로 보였으며 엄마의 보호 아래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후 의사가 와서 천을 벗기고 아기의 상태를 검사하려 할 때였습니다. 의사는 천 안에 같이 묻혀있던 핸드폰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핸드폰 화면에는 엄마가 아기에게 보내는 단문의 메시지가 찍혀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애기야, 만약 네가 산다면 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꼭 기억해다오." 엄청난 무게의 시멘트 덩이를 등에 지고 아기를 생각하며 문자를 한 자 한 자 써내려 간 어머니의 모성애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울컥한 기사였습니다. 이것이 엄마의 아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인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늘 손해 보는 사랑입니다. 주는 사랑입니다.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잘못은 인간이 하고, 그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려주시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부흥의 때가 아니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타락과 변절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영적 악성 바이러스가 서식하고 그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도저히 이쁘게 볼래야 이쁘게 볼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불러내셔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같은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걸음걸이를 고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의 줄로 이끄시고 먹을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어찌 놓겠느냐?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아드마와 스보임을 차례로 호명하십니다.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드마와 스보임은 누구입니까? 낮선이름인데요.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극심한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을 당한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인근에 있던 작은 도시들입니다(창 14장, 신 29: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놓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십니다.
아드마와 스보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아드마와 스보임을 그냥 놓아버리고 버려두었지만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그렇게 놓치 아니하시고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늘 이웃나라를 바라보며 그들이 자기들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에게, 앗수르에게 자신들을 의탁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믿는 우상을 섬기며 그들에게 떠나갑니다. 사실은 그 이웃나라가 자기들을 노예로 삼고, 민족을 말살시키는 원수의 나라인 것을 모르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의탁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금만 살만 하고 숨통이 뜨이면 다시 하나님께 거짓되고 속이는 태도로 나옵니다. 힘들면 죽겠다고 하나님을 찾지만, 조금 살만 하면 다시 하나님보다 세상을 향해서 눈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지만, 저와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불붙는 긍휼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과는 다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0~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정한 법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을 배반한 그의 백성들을 "앗수르에서부터,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비둘기같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들을 그들의 집 머물러 살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십니까? 의로운데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랬습니다만 근래에 들어서는 더욱 한국교회에 대해서 절망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틀렸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것들이 많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기에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또한 틀리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있기에 그렇게 까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은 오늘의 우리요 또한 나인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들은 넘어지며 죄를 범하겠고 실망을 드리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드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가 존재 하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놓치 아니하시며 하나님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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