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 됨이냐?(겔 18:1~4) 본문
어찌 됨이냐?
겔 18:1~4
겔18: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겔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겔18: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사람이 원치않는 궂은 일을 만났을 때나 일들이 꼬일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탓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그 문제에 대해 항상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로써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속담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 후손들이 이방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속담에 대해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감짝 놀라시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찌"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는 하나님이 놀라실만한 일을 모격하셨을 때였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신포도를 많이 먹으면 아들도 아버지가 먹는 포도를 나누어 먹을 기회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이 이가 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속담을 사용한 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다 넘기고 싶은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밀어닥친 현실적인 고통과 아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운명론을 꺼내거나, 조상탓을 하는 것이 탈출구가 될 수 있으려니 생각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다고 해서 아들의 이가 시릴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시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저들의 무지와 완악함을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도 속담이나 경구 혹은 사자성어 같은 말들이 인생을 길들이는데 이용되고 사용됩니다. 이런 말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만큼, 그 영항력이나 설득력 또한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에스겔 시대에 사용된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음으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아니 금해야 합니다.
에스겔 시대의 남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난과 불행이 조상의 잘못된 삶과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상들을 탓하면서 불평만을 일삼았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 당대(當代)에 위대한 선지자들이 지적했던 대로 당시 그들이 당하고 있던 고난의 원인은 분명 스스로의 죄악(罪惡)에 있었으나 그들은 이를 결코 인정(認定)하지 않고 이러한 속담을 통해 자기 조상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무고한 자신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부정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은 원망하는 것이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품지 못한체 절망 속에 살 수 밖에 없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의 뿔이요, 산성이신데 하나님을 등지고 서 있으니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 때에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점령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면서 겪게되는 어려움과 아픔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올바르게 신앙하므로 남유다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너희가 이렇게 된 것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온전히 섬기지도 못하는 너희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조상탓, 아버지탓 하는데, 너희의 죄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2월 둘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설명절연휴 마지막날이기도 합니다. 영절에 가족들이 만나면 누구의 덕이라고 하면서 세배를 하고 감사의 정을 나눕니다. 그러데 그와는 반대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조상이 해준것이 뭐 있어? 아버지가 해준 것이 뭐 있어? 형님이 한 것이 뭐 있어? 하면서 울분을 가족들에게 쏟아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이 원수처럼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자신의 문제는 자신 스스로가 책임져야 합니다. 조상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각자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죄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도 솔직하게 고백하기는 커녕 오늘의 고통을 전부 조상 탓으로 돌리면서 책임까지 회피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하신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선고하셨습니다. 3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그런 다음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라 하셨습니다.
아들의 영혼이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면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들도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합니다. 때문에 아버지든 아들이든 자신의 범죄에 의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설령 죄의 길을 앞장선 사람이 가르치고 권했다고 하더라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순전히 선택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범죄한 영혼이 죽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나 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아버지 죄 때문에 아들이 죽거나,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죽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든, 아들이든 범죄한 그 영혼이 죽을 것이라는 겁니다.
가문이나 가정의 형편이 동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물결에서 휩싸이는 것은 동정할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은 받을지 몰라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대에 동조하고 그 흐름에 합세한 것은 그 사람의 분명한 의지에 따른 결정인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불리하더라도, 그 환경 때문에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칠 수는 없습니다. 묻혀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통해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조상의 죄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을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의 한 의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끝까지 죄인이 아닌 의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자식이나 어디에 속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단독자로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단독자로 여겨야 합니다. 특히 죄의 값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누구의 탓을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다른이에게 전가해 버림으로 인해서 자신이 치러야할 댓가가 없다고 생각함으로 인해서 속량하시는 주님을 거절하는 불신에 떨어지면 안됩니다. 범죄의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은 결코 죄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성경 어디에 범죄의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어서 그것이 성사된 일이 있었습니까? 결코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짓과 참소라는 사단 특유의 죄를 더할 뿐입니다. 실로 범죄한 성도에게 필요한 행동은 책임 전가가 아니라 겸손한 회개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범죄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주님의 보혈을 겸손히 의지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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