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6) 본문
어찌 동행하겠느냐?
암 3:3~6
암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암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암3: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암3: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원인없이 결과만 덩그렇게 놓여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서 오늘 말씀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원인없는 결과가 있더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리 몇가지 보충적인 질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시키십니다.
이어지는 질문에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느냐?"하셨습니다(4하). 사자가 부르짖는 것은 그가 먹이를 움켜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자라도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숨소리조차 죽입니다. 사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이 사냥을 끝내고서야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질문은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집한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5). 여기서 두번에 걸쳐 덫으로 번역된 말은 첫번째 덫은 히브리어 '파흐'이고, 두 번째 덫으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모케쉬'라는 말인데, '파흐'는 새를 잡기 위해 땅에 놓은 덫을 의미하고, '모케쉬'는 미끼, 또는 함정을 의미합니다. 새가 덫에 걸리는 것은 사냥꾼이 그 곳에 미리 덫을 놓았기 때문이며, 덫이 흔들리는 것은 짐승이 그 덫에 걸려서 몸부림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은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면 어찌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어찌 재앙이 성읍에 임하겠느냐?"는 것입니다(6). 파수꾼은 보초를 서다가 적군이 공격해 오면 성읍 거민들을 위해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러한 경고의 나팔이 울려퍼지면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읍의 재앙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없이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어찌 원인 없는 결과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본문 중에 3:3절을 중심으로 해서 "어찌 동행하겠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동행(同行)이란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한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동행이란 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뜻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뜻이 맞아야 합니다. 생각이 맞지 않고 뜻이 맞지 않아서 파경을 맞는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어진 동행에 대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뜻을 맞추어 함께 하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의 뜻이 내 뜻과 같던지, 아니면 내 뜻이 주님의 뜻과 같아야 둘이 사이좋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고서 주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뜻이 내 뜻보다는 더 지혜롭고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사55:9에서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모스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지 않은 백성 때문에 하나님이 탄식하시던 시대였습니다. 높은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낮은 인간의 생각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하는 결과를 위해서 둘이 의합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합하는 백성들이 되도록 권면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여 길을 간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의합한 것입니다. 같은 뜻을 품은 것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동행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기록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서 에녹의 하나님 동행의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창 5:21~24에 "에녹이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그 아들 무드셀라를 육십오세에 낳고 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여 삼백 년 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00년이라는 그의 놀랄만한 성실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300년 동안 변절하지 않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그가 또한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면서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루아침에 습득되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엄있는 걸음으로 움직이셨고, 에녹은 보조를 맞추는 일에 종종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안그럴 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에 동의하고 하나님이 시키신 훈련과 격려에 순종으로 응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30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와 동행하려면 그 어떤이 보다 앞서 달리지 않고 뒤에 처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앞서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게 뒤처지지도 않아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말씀을 따라 그가 지시하시는 길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즉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설령 그가 말씀하신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섬들아 잠잠하라"하셨습니다. 섬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그 소음소리가 귀를 아프게 하고, 머리를 혼돈스럽게 하고,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힘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삼상 3:18절 말씀처럼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지금 수준으로 살펴본다면 극도로 이상하게 여기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일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선한 소견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던지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없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미혹하는 자가 말세에는 나타날 것이라고 계시록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치 아니하도록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겁주며 그렇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미혹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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