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이사야 40:27~31) 본문

하나님의 질문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이사야 40:27~31)

유앙겔리온 2021. 1. 8. 06:26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이사야 40:27~31

사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이 조금만 피곤하고 지칠 때면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그 절정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포로생활에 지쳐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잘 나타나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절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잃고 이방 땅에 포로가 되어 끌려와서 겪은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었으나 하나님이 들은채도 아니하시고 모른채 했다는 불평인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생활 가운데서 억울한 일들을 만났을 때, 자신은 정당한데 자기의 그러한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부당하게도 외면당하고 가리워져 있다는 원망이었습니다. '여호와께 숨겨졌고 하나님께 벗어낫다'는 말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보다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지치고 피곤한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는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을 때에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앙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력을 다해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께 시선과 마음을 고정해야 합니다. 누가 깐쭉거려도, 어떤 폭풍이 몰아치고 어떤 비바람이 불어와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을 잃어버려가고 있습니다. 신앙을 못하게 위협하는 세력은 없을지 몰라도 악한 마귀 사단은 아주 은밀하게 축축이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도록 반기독교적인 정서로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를 앙망하지 못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침체에 빠져서 늘 영적으로 피곤하고 곤비함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너무 쉽게 피곤해 하고 지치고 포기하고 쉽게 낙심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천하를 다 얻을 것처럼 고무되다가도 조금 기운이 빠지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낙심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조그만 일에 고무되고 조그만 일에 낙심하고 실망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믿음 안에서 산다고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육신은 낡아지고 깨어져 질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경제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도리어 악화되어 가난을 겪거나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대화는 꽉막히고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나를 버린 것과 같이 생각되는 영적인 침체의 깊은 늪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마도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념과 확신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라가 망하는 일이 찾아왔고 긴 포로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들의 포로 생활은 변화가 없었고 원수인 바벨론은 갈수록 더욱 번창하고 건재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고 피곤하고 곤비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변화가 없고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메이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탄식한 것입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포로생활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외면당하고 버려진 자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질문이 바로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라는 질문의 말씀은 이미 그들이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요, 이미 들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에 대해서 "알기도 하고 듣기도 했으나" 전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이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라고 들려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 28~31절 말씀인,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 하나님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시며,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그분의 자녀들이라면, 그분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치며 올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네 가는 길이 피곤하고 곤비할지라도 무능하고 힘이 없음을 경험할지라도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줄로 믿고 잠잠히 받아들이고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해도,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넉넉히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나가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삶을 더욱더 피곤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원망과 불평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하시는 말씀 앞에서 "내가 알았습니다. 내가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나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나에게 힘을 더하셔서 피곤하고 지쳐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게 하시고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으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고하지 아니한 자가 되었습니다.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