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이사야 22:15~18) 본문

하나님의 질문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이사야 22:15~18)

유앙겔리온 2021. 1. 8. 06:25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사야 22:15~18

사22: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사22:16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사22:17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사22:18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모방송국 '내일은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인기를 얻고 있는 한 트롯가수가 자신의 실화인지 아니면 어떤 지인의 실화인지 어떻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래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아프다며 집에서 잔다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클럽에서 함께 나오는 것을 우연히 맞닥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노래하면서 뒷목을 잡고 춤을 추는 코믹한 안무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예상밖의 인물이 예상 밖의 장소에서 나오는 모습과 맞닥뜨렸을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놀라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묻는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셉나가 바로 그와 맞딱뜨렸을 때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셉나를 만나서는 안될 곳에서 만나서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영광의 무게를 견디어내고 영광의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유다의 운명이란 것이 바람앞에 흔들리며 꺼져가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앗수르가 벌써 두번째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셉나는 이 때에 유다의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왕 다음의 최고의 지위를 지닌 자였습니다. 

  그런데 셉나는 나라의 중책을 맡은 관리었지만, 위기에 처한 나라보다 자기 영달에 관심을 둔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셉나는 "위기에 처한 나라보다는 자기 죽음 이후에 들어갈 자기 묘실을 파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일에 목숨을 걸고 힘쓰고 애써야 하는데 그런 중차대한 일은 내버려두고 죽음 이후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묘실을 조성하는데 열정을 쏟았습니다. 셉나는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무게를 견디어내지 못했고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를 가까이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애굽을 의지하고 가까이 했습니다. 친애굽 정책이 그의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그가 지금 할 일은 묘실을 파는 것이나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 고통당하는 백성의 삶으로 내려가 그들을 돌보고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셉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6절에서 '여기'라는 말이 세번이나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셉나는 힐난 받을 곳에 있었고 힐난받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바로 그가 힐난받을 만한 곳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왕들과 왕족들이 팔 수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들의 묘실을 파고 가기 업적을 기리는 반석을 쪼아새겨 만드는 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권리와 물질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하셨습니다.

  이 말의 본뜻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또는 네가 어떻게 그런 권리를 얻었느냐? 왜 니가 거기에 있느냐? 왜 니가 거기서 나오느냐?"하는 말씀입니다. 셉나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셉나는 자신이 나와야 할 곳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셉나가 기도실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웠겠습니까? 셉나가 왕실과 나라을 걸머지고 있는 고관들과 회의실에서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은 전혀 예상치 못한 뜬금없는 곳에 있었고, 거기서 땀을 흘리고 있었으며, 거기서 나왔습니다. 왕실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묘실이 있는 곳에 머뭇거렸고, 그곳에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위한 묘실을 파고 자기의 업적을 기릴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 처소를 쪼아내는 일을 하면서 땀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셉나를 향하여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리와 사명을 지키고 그곳에 머무르고 하나님이 보시고 찾으실 때, 그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뜬금없는 곳에 머물고 뜬금없는 곳에서 나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해야할 영광의 무게를 지는 일이며, 그 무게를 감당하는 자의 처신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25절에 보면 "단단히 박힌 못"도 때가 되면 삭아 부러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떨어져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하물며 단단히 박히지 못한 못이라면 애초부터 실패를 불을 보듯 뻔한 결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단히 박히지 않고, 삭아부러진 못과 같은 셉나의 지위와 영광을 거두어 엘리아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셉나에게는 18절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했었는데, 결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셉나를 폐하시고 셉나가 입었던 옷과 그가 띠었던 띠와 그가 쥐었던 권한을 힐기야의 아들 에리야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셉나는 광야에 쫓겨나서 죽었는데 장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대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이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가 거두어지면 주어진 모든 것도 거두어지고 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셉나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하도록 지혜와 지식과 건강과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혹 미혹을 받더라도 영광의 무게를 벗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욕망과 욕구에 끌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광의 무게를 잘 견디어내고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