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사 10:15~19) 본문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사 10:15~19
사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사10: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사10: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사10:18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사10:19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는 도구임을 믿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스스로 큰 체하하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도구됨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으로써 국제정세를 움직이시는 가운데 앗수르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책망하시고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시기 전에는 그들은 흩어져 있는 연약하고 작은 부족들이었고 그런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시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셨을때 그들은 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끼이며 톱이며, 막대기요 몽둥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높아져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능력이라고 생각고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했고 자랑했습니다. 자행자지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손에 잡고 경건치 않는 나라들과 하나님을 노하게 한 백성들을 치고 탈취하게 하셨습니다. 앗수르는 당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앗수르 자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앗수르가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가 되니 강력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를 높여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6절)하면서 자만했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힘과 지혜로 행하였다고 자랑했습니다(13절).
이 일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앗수르에게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찍는 사람과 켜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는 도끼와 톱이 어떻게 스스로를 자랑하고 스스로가 높은체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끼는 나무를 찍는 자에게 사용되는 두구이며, 톱은 나무를 켜는 자에게 쓰임을 받는 도구입니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그 막대기와 몽둥이를 든 자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객이 전도되어서 도끼와 톱, 막대기와 몽둥이가 자기 마음대로 설친다면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도끼, 톱, 막대기, 몽둥이 이런 미물들은 아무 보잘 것 없는 도구일뿐입니다. 장식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에 빠져서 자신을 도구로 쓰신 자의 뜻을 무시하고 제 하고자 하는대로 마음대로 그것을 휘두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막대기와 몽둥이로 쓰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면 쓰임 받고 버림 받는 자가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내가 주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도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교만을 부리게 됩니다. 그러다가는는 앗수르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중 16~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았던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본문을 잊고 교만하다 앗수르처럼 패망의 길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도구로 사용된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주인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는 교만하다 점점 약해지고 황폐해지고 마침내 지금은 흔적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귀하게 쓰임 받고 버린 바 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위치를 분명하게 잘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의 손에 붙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도끼나 톱이나 막대기나 몽둥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지 아니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그런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겸손히 주를 섬겨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때까지 도구로 붙잡고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잘 되고 많은 것을 느리게 될 때에 가장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가 교만하고 오만함에 빠져서 넘어지기 쉬울 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나 장점보다 가난이나 약점이 다루기가 더 쉽습니다. 부나 장점이나 번영은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간절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할 떄나 약점을 가지고 살아갈 때는 얼마 간절합니까? 얼마나 애원합니까? 그렇지만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고 남부럽지 않아지면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는 간절하지 않게 됩니다.
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절대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게 좀 있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 지위가 높다면 하나님께서 단지 나를 높여주셨을 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앞에 겸손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입니다.
삼손의 손에 붙잡혔던 나귀 턱뼈처럼 보잘것 없어 보여도 겸손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임받습니다. 삼손은 지나가는 길에 턱귀턱뼈 하나를 주어서 레히에서 원수인 블레셋인 1,000명을 넘어뜨는 일을 해냈습니다. 칼도 아닌 것이 창도 아닌 것이 나귀 턱뼈에 불과한 것이 삼손에 손에 붙잡혀서 이런 일을 낸 것입니다.
주님은 배신 잘하고 겁도 많은 베드로를 쓰셨습니다. 그 속에 반석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너를 배드로라 하지 않고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주니믄 '번개의 아들'이라고 하는 별명이 붙은 거칠고 급한 성격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을 쓰셨습니다. 그 속에 교회의 기둥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기둥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병약한 바울 속에서 교회의 터전을 발견하시고서는 그의 교회를 세우는데 바울을 다메섹도상에서 그렇게 극적으로 부르셨고 그를 기여히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쓰임 받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 붙들고 쓰시는 사람이 되어지도록 간구하며 겸손히 엎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을 누릴 때, 여러분의 가정이나 사업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복을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도끼가 찍는 자에게, 톱이 켜는 자에게, 막대기가 그것을 드는 자에게, 뭉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 같이 그 주체가 되려 하여 스스로 하나님 되려 하는 사단의 속성을 품은 자로 살아가면 안됩니다. 그렇게 살면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쓰시기에 어떤 도구 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쁘고 편안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겸손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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