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이사야 6:6~13) 본문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
이사야 6:6~13
사6: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의 소명부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은 "여호와의 능력"이란 뜻을 지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바르게 하려고 했던 왕,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했던 왕, 그런데 그가 죽었습니다. 백성의 좋은 리더를 잃었습니다. 왕정시대에 왕의 죽음은 그 나라와 민족에게 있어서 분명 위기의 순간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에 이사야는 하나님 체험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위기와 소명은 함께 옵니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좋은 사람, 휼륭한 사람이 떠날지라도 낙심하거나 원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달려 나갈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영광중에 계신 만군의 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큰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고민스러운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언제 들렸습니까? 제단 숯불이 그의 입에 닿기 전까지는 이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스랍중 하나가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하셨을 때였습니다. 자신의 죄악된 정체성을 발견하고 거꾸러져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특정해서 "내가 너를 보내니 너는 우리를 위하여 가라' 하고 이사야를 직접 부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음성이 이사야 자신을 불러 질문하시는 음성으로 그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특정하여 부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강압적으로 그가 부르신 일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고민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그 음성이 이사야의 귀에 들려서 이사야는 스스로 자원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명을 받았을 때, 그 소명에 응답했을 때 이사야는 이미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써 성전에서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 시대에 할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그 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시대에도 성전제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 죄악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미 하나님의 일꾼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들을 다시 멸망할 이 세상을 중보할 크리스천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며 살아갈 하나님의 사람들로 이 시간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듣고 못 듣고 하는 것은 우리의 귀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을 듣게 될지는 자신의 성향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듣게 되는지는 자신의 영성에 달려 있고 자신의 선호에 달려 있습니다.
이사야가 오늘 주신 그 질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듣는 귀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영적성향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고민하는 음성은 깨어 있는 영혼들에게만 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의 영성이 이사야의 영성과 동일한 영성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가 쓰실자를 부르시는 방식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가라" 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일꾼이 필요한 안타까운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고민하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때 이사야처럼 "주님! 내가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늘 이런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고 헌신할 수 있는 영성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한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적이고 대단한 결과를 약속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것을 예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에 백성들이 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더욱 하나님을 거절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성공을 보장한 것이 아니라 절망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9~1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사역은 결과가 좋은 사역을 주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쁜 사역을 주셨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둔하게 하라'에서 둔하게 하라(하쉬멘)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살이찌고 마음에 기름이 덮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감성을 잃게 됩니다. 지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가 '막히게 하라'에서 막히게 하라(하크베드)는 '무디게 하라'는 뜻입니다.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눈이'감기게 하라'에서 감기게 하라(하솨)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좋지 않는 결과의 일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성과가 좋은 일에는 구나 나를 보내주세요. 저요! 저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 길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망해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사야에게 재차 물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너의 사역은 실패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정한 때까지 이 사역을 계속 할 수 있느냐?"
어쩌면 우리의 사역의 현장이 이사야 때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현대인들에게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는 예견된 사역처럼 보입니다. 그 만큼 교회의 이미지가 세상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처럼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과정은 지루할만큼 더딘과정일 수 있으며 결코 쉽게 열매를 맺는 일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우리의 부르심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그런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처럼 자원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즐거이 그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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