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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여인의 비유(에스겔 16:6-22) 본문

비유의 복음

부정한 여인의 비유(에스겔 16:6-22)

유앙겔리온 2019. 4. 4. 20:18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의 복음은 에스겔서 나오는 "부정한 여인의 비유"입니다.


  옛날 유대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물과 기름과 소금으로 깨끗하게 씻어 잘 기르지만, 사생아이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 등 원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탯줄도 자르지 않고 들에 버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코 좋은 일도 아니고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않되지만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졸종 일어납니다.  

  오늘 현실세계속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정말 천한 여자 아이가 나옵니다. 이 천한 여자아이는 탯줄도 끊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병들이들어도 고칠 수가 없었고 차라리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버려진 아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강해서 죽지 않아고 살아 있어서, 버려진 아이가 있는 곳을 지나던 어떤 마음씨 착한 귀한 분이 이 여자 아이를 데려다가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탯줄을 잘라주고, 물로 씻겨서 피를 없이 하고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쒸어 왕후와 같이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워서 자신의 종국에는 자신의 아내로 삼아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 아이는 성숙해지고 화려해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이방에까지 그 명성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진짜로 이 여자는 신데렐라와 같이 된 것입니다. 버려진 아이의 처지에서 일약 스타로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5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네가 화려함을 믿고 네가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이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버려진 여자 아이를 데리고 병을 고쳐주고 키워서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서 너는 내것이라고 했건만 이 여자는 그것을 저버리고 길 거리에서 아무 남자나 더불어 음란을 너무나도 많이 행한 부정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었는데 그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값없이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까? 
 
  그런데 이 말씀이 비유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피투성이 여자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원래 히브리인이라고 할 때 그 "히브리"라는 말 자체가 강을 건너온 떠돌이, 가난뱅이, 나그네란 뜻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셔서 "왕같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여호와의 소유"가 되게해주었습니다. 선민으로 세우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8절에도 보면 "내 옷으로 너를 덮으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히브리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분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꾸며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이방 땅에까지 소문이 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제일 먼저 받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삶은 죽는 순간까지 아무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는 것입니다.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직했다고, 실연했다고, 실망했다고, 죄를 지었다고, 심지어 못생겼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어리석고 나쁜 일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그 무엇보다 큰 것이고,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지금도 우리의 목숨을 보존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 16:6)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희망은 자기를 버리지 않는 자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 피투성이 같은 심정일지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투성이라도 살낼려고 하고 살아 남으려고 할 때 살려고주시고 살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살아갈때 그 기회를 은혜 값는 기회로 삼고 살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산 것처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전에 여기 나오는 버려진 여자 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시고 입양하셔서 양육하시고 치장해주셨습니다. 그 옷으로 덮어서 너희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없으나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랑과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줄 알고 항상 감사하고 빛과 소금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범죄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답할꼬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기회로 약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큰 은혜를 입고도 교만하여 타락으로 욕되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경성하는 기회로 삼아고 그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에스겔로 하여금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여기 기록된 버려진 여자 아이와 그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남편과 같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자기의 본질과 본분과 자기의 근본 처지를 잊고 현재의 화려함에 취하여 교만하게 되고 자기를 변화시켜준 귀한 은혜의 주님을 배신하고 배반하는 경우고 너무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시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져주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