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비유(에스겔 23:1-21) 본문
오늘 이야기는 부부간의 불성실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백성들의 죄 많은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어미의 딸(23:2)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어미는 남북으로 나뉘기 전에 원래 하나였던 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딸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을 여호와의 아내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입니다.
그런데 이여인들은 남편을 속이고 어디서든지 만족을 얻으려고 혈안이 된 여인과 같았습니다.
오홀라란 이름의 뜻은 "천막"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오홀리바란 이름의 뜻은 "그녀 안에 있는 내 천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름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장막, 성소와 처소의 함축적인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같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은혜를 배풀어주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표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후한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오홀라의 이야기(23:5-10)
사마리아의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사마리아를 상징하는 오홀라는 "정든 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한다고 하면 여기서 정든자는 누구를 뜻하냐 하면 곧 이웃나라인 앗수르왕국을 의미합니다. 앗수르는 외적으로 화려고 멋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왕국과 동맹관계를 맺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오홀라에게 좋은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단물만 빼먹으려고 하는 존재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단물이 다 빠지면 버리움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홀라는 앗수르인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를 예증하고 있습니다. 즉 죄를 섬기는 자는 죄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당해 우물 쭈물하게 되면 우리는 곧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려 우리 주인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완강히 거부해야 합니다.
오홀리바의 이야기(23:11-21)
오홀리바는 오홀라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을 보면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았으면 동생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같은 길을 가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오히려 그녀는 형보다 더 부패하였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형이 갔던 부도덕한 부패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앗수르에게 아첨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술 더 떠서 음욕을 더 행했는데 앗수르가지고 부족해서 바벨론을 의지했고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한 나라만 의지한 것이 아니고 많은 나라를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옳은 것인데 강대국들을 의지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간음한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말하기를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야곱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시 146:3-5).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강대국을 의지하면 강대국이 망할 때에 그것을 의지한 인생도 망하는 것입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어떤 때에도,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늘 앗수르와 애굽과 같은 죄의 유혹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셔거서그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음행의 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
육적 간음도 벌을 면치 못하는데 영적 간음은 더욱 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며 사람들을 의지하는 불신자들이 되어 영적 간음하는 추한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섬기고 그를 영화롭계 해드리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노예가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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