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찾지 아니하겠느냐?(눅 15:3~10) 본문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가치가 중요한 것을 잃었다면 그것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것, 버리려고 했던 것을 잃어버렸다면 어쩌면 속 시원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귀한 것이라고 하면 그리고 가치와 의미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으로 인해서 찾아나서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하신 예수님의 질문과 7절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 이 두 질문을 중심으로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나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나 잃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찾기까지 부지런히 찾는 다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100마리 중에 양 한 마리는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는 100마리 중에 한 마리일뿐입니다. 가치로 따진다면 100분의 1일뿐입니다. 그러나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상황속에서는 일시적으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는 전체보다 중요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99마리 양을 들에 놓아둔채 그잃은 한 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는 것이 목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누가 감히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느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드라크마도 그렇습니다. 여인이 신랑으로부터 기념품으로 받은 10개의 드라크마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한 개를 잃어버렸을 뿐인데 하면 찾아보지도 않고 남은 9개의 드라크마로 인해서 위로를 받기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9개의 드라크마 보다는 그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기 까지 부지런히 찾아나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을 향하여 누가 그런 일은 비효률적인 처사라고 하면서 비난 할 수 있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비슷한 비유가 소개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슷한 비유를 세 가지나 말씀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눅 15:1~3절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잃은양의 비유나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나 잃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지금 하시고 있는 사사역들을 향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근거리고 비난하는 것 때문에 하신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찾아가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고 하는 것을 오해함으로 그들을 깨닫게 하려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시키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친하시며 친구로 "맞아들이고" 음식을 "같이 나누시는" 것을 통해서 자기들만 누릴 것으로 생각했던 은혜를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누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투정을 부린 것이고 마찰를 빚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등 해서는 안될 일을 한다고 트집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일을 변호하하시기 위해서 작심하시고 비유를 내리 3개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래 잃어버린 바 된, 양이나 드라크마도 한 무리였고, 한 꾸러미에 속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100마리 양 때 중에 한 마리, 열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연으로 인해서 잃어버리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구의 자잘못을 따지는 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는 제 힘으로 스스로 그 주인에게 찾아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찾아나서서 찾지 아니하면 영영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양의 목자와 드라크마의 주인인 여인이 찾아 나서서 있을만 곳을 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왠 시비이며 트집이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찾게 되었다면 큰 기쁨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도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법이며, 유쾌한 사람은 같이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잃었다 찾은 것을 거기에 다 써 버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즐거워하자"고 이웃을 불러모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7절과 10절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했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죄인들이 돌아오고, 자비가 죄인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난하기는커녕 기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회개할 필요"를 못 느끼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들을 더욱 기뻐 여기신다 믿으며, 스스로 "사랑하고,"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이나 세리들을 더욱 사랑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늘 가지고 즐기던 것을 항상 그대로 유지하는 것보다, 잃어버렸다 찾을 때 더욱 큰 기쁨을 느낍니다. 늘 건강한 것보다 아팠다가 건강을 되찾을 때 더욱 기쁜 것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늘 꾸준한 신앙 생활도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지만, 악한 길과 죄된 생활에서 급격히 돌이켜서 새 생활하는 것이 더욱 놀라운 즐거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쁨"이 큰데, 이러한 하늘의 뜻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방해하며 분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격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당연한 것을 어찌 너희들은 이 일에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시비거리를 삼고 투털거리며 비난만 일삼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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