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 14:31~33) 본문

예수님의 질문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 14:31~33)

유앙겔리온 2018. 2. 19. 19:57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말씀은 지난 수요저녁기도회 시간에 나누었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고 질문하신 예수님의 질문과 쌍둥이 질문으로 알려진 것으로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예수님의 질문은 전쟁에 나가려는 임금이 적군과 아군의 전세비교와 승패의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는 "당연합니다."라는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아주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명쾌한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답변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서 대답을 망서리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쌍둥이 비유이기도 하고 쌍둥이 질문이기도 하니까 참깐 두 질문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일이 건설적인 것이라고 하면 오늘 전쟁하는 일은 파괴적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망대는 세울 수도 있고 세우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건축주의 자율에 달린 문제이지만 다른 나라가 침입해 올 때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른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은 더 적극적으로 반드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같은 것은 망대를 세우는 건설적인 일조차도 다시 말해서 좋은 일일지라도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건설적인 일을 위해서도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좋은 일을 하는데도 마땅히 우선해서 선결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중도에 멈추는 불상사를 겪게 되고 투자한 만큼의 물질적인 손해를 보개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경솔하게 비용을 계산하지 하지 않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남 앞에서 폼 한번 잡아보려고 망대를 짓다가 그만 두면 오히려 비난과 멸시를 함께 받아야 하고 손실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망대를 세우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세우고자 하는 망대를 충분히 세울 수 있는 비용조달이 가능한가를 먼저 가름해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망대를 세우는 비유나 질문은 어쩌면 오늘 전쟁에 나가는 왕의 비유와 견주어 봤을 때는 가벼운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망대를 짓는 자가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망대를 짓다가 중간에 그만 두게 되면 비난정도 받고 투자한 것만 날리면 그만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차원이 다릅니다. 전쟁이란 실패하면 죽는 것입니다. 생사의 문제가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실패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망대를 세우는 비유'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망대를 세우는 비유에 있어서는 지불해야 될 댓가가 돈이지만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비유에 있어서는 지불해야 할 댓가는 생명이고 나라입니다.

 

  그러니 누가 함부로 전쟁을 시작하겠습니까? 생명이 걸린 문제인데 생각 없이 전쟁을 시작하겠습니까? 치밀한 계산과 작전 없이 전쟁을 시작할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헤아려보지도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적의 숫자는 얼마인지?', '그들의 무기는 어떠한지?', '그들의 훈련 정도는 어떠한지?', '그들의 작전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캐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군의 숫자는 얼마인지?', '무기와 훈련은 잘되어 있는지?', '군사들의 사기는 어떠한지?', '그들을 꺽을만한 작전은 무엇인지?' 점검해 보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자신을 믿고 싸움터로 나가는 군인들, 그들을 믿고 있는 가족과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헤아려 보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철저하고 완벽한 준비 끝에,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할 수 없을만큼 자신의 군대가 약체이거나 항거할 수 없을만큼 무능한 군대라면 먼저 화친을 청하여 적의 요구를 들어주고 백성과 나라를 살려 내는 일을 임금이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전쟁에 나가는 것', 곧 '생사를 거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망대를 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전쟁에 나가는 임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준비하는 왕의 심정으로 생명을 건 싸움을 준비하는 비장한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장난삼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 것은 엄벙덤벙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를 거는 것처럼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임금)과 같이 생사를 건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전쟁을 준비하는 왕의 심정으로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