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묵힘의 차 본문
보통 차는 풋풋한 햇차로 마셔야 맛과 향이 좋습니다. 햇차로 마셔야 할 차들은 세월이 흘러 묵으면 눅눅해지고 맛과 향이 변하여 차에 대한 기대를 저리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런데 차 중에는 푹 묵혀야 차가 되는 그런 차가 있습니다. 우리 전통 된장이나 간장처럼 묵힐수록 맛이 있고, 묵힐수록 향이 깊어지고, 묵힐수록 가치가 있고, 묵힐수록 완성도가 높아지는 차가 있습니다. 묵힘의 차는 이 맛이다 싶어 우려 마시다가도 맛이 없다 싶으면 아무 구석에나 밀어 넣어놓았다가 다시 그 차가 생각나면 꺼내 마시면 되는 차입니다. 좀 게을러도 괜찮고 무심해도 괜찮은 차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 세월과 함께 묵혀 발효가 되는 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습니다.
묵힘은 곧 시간입니다. 묵힘은 시간의 양이 관건입니다. 묵히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수적 요소입니다. 묵힘은 시간이란 비싼 값을 충분하게 지불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차의 역사를 만들고, 차의 이야기를 만들고, 차의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묵힘을 흐른 시간으로 만들어진 역사와 이야기와 문화는 해석을 낳게 되고 해석은 해석의 해석을 낳아 전통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즐겨 마시는 차는 묵혔다가 마셔야만 제 맛을 내는 차입니다. 묵힘의 차는 일명 시간을 품은 차입니다. 시간 삼킨 차, 세월 잡아먹은 차가 묵힘의 차입니다. 세월이 꽉찬 차는 정말 맛이 좋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제일 아쉬워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입니다. 시간은 배틀의 북같이, 쏜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중년에 이르고 노년을 바라보게 되면 괜시리 시간의 흐름이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나이 먹음이 인생사 뒤안길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것이기에 애석하기도 하고 아쉰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힘의 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결코 시간의 흐름이 서글프고 아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묵힘을 위해서라면 어서 속히 세월이 흘러줬으면 할 때가 많습니다. 굳이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결코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이 묵힌 차를 좋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묵혀 황홀한 차 한 잔 마시고 깊이 잠이 들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 가게 되면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차를 묵힐 때는 시간의 흐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묵히는 환경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차는 순료를 채취하는 그 차나무가 위치한 산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야생차니 생태차니 교목차니 대지차니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차를 누가 어디에 어떻게 보관했느냐도 중요합니다. 차를 묵히는 것은 공간의 과학, 공간의 미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를 묵히는 공간의 온도, 습도, 빛, 바람, 산소, 냄세, 각종 균 이러한 요소들의 있고 없음과 증감이 발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곧 향과 맛과 영양을 결정하게 됩니다. 향과 맛이 좋아도 영양이 나쁘면 안되고 영양이 좋아도 향과 맛이 없으면 즐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묵힘의 차는 흔히들 "이야기로 마시는 차"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차, 이야기 자산이 많은 차, 이야기로 마시는 차,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차이기 때문입니다. 묵혀야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묵혀 나온 이야기들은 지혜가 있습니다. 잠언입니다. 묵은 인생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잔소리로만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이야기가 있는 묵힌 차가 귀히여겨집니다. 묵힌 차를 마시면서 푹 묵혀진 잠언을 듣는다는 것은 복된 일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묵힘의 차에는 차의 산지, 차를 구입했던 과정, 차를 보관하고 묵히는 과정, 그런 차 때문에 만난 사람들 등등의 이야기 꺼리가 가득합니다. 그런가하면 차를 마시는 날, 날씨, 장소, 다구, 다화, 다서, 다식, 함께 마시는 다우, 분위기 등등 아주 소소한 것들조차도 이야기 꺼리가 됩니다. 그래서 묵힘의 차는 분위기의 차이며 분위기를 타는 차이며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차입니다. 그래서 차는 과학이며, 문화이며, 종합예술입니다. 그러니 묵힘의 차는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차이며 이런 차문화를 생산해낸 사람들의 지혜는 칭찬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차 한잔 마시는데도 부채감이 느껴집니다. 부채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 모든 것을 빌려쓰다가 가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햇차를 마시는 것보다 푹 묵혀 익힌 묵은 차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묵힘의 차처럼 나이 먹음이 묵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묵힘의 차가 묵히는 세월에 의해서 가치 있고 귀히 대접받고 맛이 있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묵힘의 차와 같은 것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찻자리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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