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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비유(엡 5:22-33) 본문

비유의 복음

남편과 아내의 비유(엡 5:22-33)

유앙겔리온 2017. 3. 20. 20:58

  남편과 아내, 머리와 몸,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다 한가지 원리를 이야기해주는 비유들입니다.
  이 비유는 서로 깊은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비유이며 서로를 위해서라고 하면 아낌없는 희생과 수고와 사랑을 하는 관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머리와 몸 사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 신랑과 신부 사이는 더 이상 가까울 것이 없는 사이입니다. 만약에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있으면 그것은 곧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여들면 문제가 생기는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되기전에, 남편과 아내가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전에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 31절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려면 '부모로부터의 떠남'으로 시작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 19;5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떠남'은 단순한 공간적인 떠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부부들의 문제의 뿌리는 부모에게서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떠나지 못한 채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의 연합이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 보면 부부가 합하여 한 육체가 되지못하고 갈등을 빚는 경우를 보면 부부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일 때가 참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부모입니다.

 

  조운숙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라는 책을 보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한 침대에서 여섯 명이 함께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편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남편의 부모, 아내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아내의 부모, 이렇게 여섯이 함께 살고 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나 그 어떤 것들도 부부들의 연합을 부실하게 만든 원인이 되면 안됩니다.
부모가 마지막 자식에게 해줘야 하는 것은 자식의 부부생활이 든든히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들의 부부생활에 할 수만 있으면 간섭이나 개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이지만, 동시에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도 동일하게 순종되어야 할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혼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는 일이라면 결혼한 이상, 부부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많은 부부들의 관계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부모들이 그들을 원격조정하기 때문입니다.
떠나고 떠나보내는 일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결혼했으면 부부문제는 부부가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참된 신랑과 신부가 되고 참된 남편과 아내가 되어 건강한 가정을 이루려고 하면 "그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독립적인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날 때, 독립적인 인격이 될 떄 "합하여 한 육체가 되어"온전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지나치게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늦게 독립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인데 장성하여 부모의 것을 먹고사는 자녀들을 일컬어 빨대라고 한답니다. 아직도 빨대가 몇개냐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곳에 있을지라도 장성했으면서도 자기 스스로 인생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모의 것을 의지하는 것은 것은 빨대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서로 복종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복종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가장 감격해하고 가장 선호하는 성경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엡5:21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셨습니다.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자 그의 말씀과 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복종을 받으셔야 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22절에서 한번 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아내에게 부탁한 이유는 그렇게 해서 아내가 남편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5:23 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이유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라는 말은 남편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표현이 아닙니다. 머리는 리더십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리더를 필요로 하고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리더십의 궁극적인 존재이유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함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럼으로 남편과 아내는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되며 자기 아내를 미워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머리와 몸,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서로에게 하는 것이 곧 자기에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 남편과 아내가 얼마나 사랑을 해야하는 가를 그리스도와 교회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값주어 산 교회"입니다. "피" 곧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고 산 교회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다 바치는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성경이 남편에게만 사랑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하라"고 명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서2:4에 보면 "젊은 여자들은 (무엇보다)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의 관계는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더 상호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더 연약한 그릇으로 묘사한 여성을 보호하고 세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남편이 보다 관심을 갖고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성경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책임으로서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추상명사인 사랑이란 말을 동사로 풀이하면 '치러내다'와 '감당하다'입니다. 육체는 물론 마음까지 잡혀주는 것,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마음의 칼자루를 끝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람의 관계 속에 어찌 절절한 사랑만 있겠는가, 미움, 다툼. 지겨움, 원망 등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걸 치러내고 감당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처받을까봐 마음의 칼자루를 조금 내밀었다가 다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를 깨끗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말씀으로  신부되는 교회를 깨끗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머리와 몸, 신랑과 신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상대를 위해서라고 하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봉사할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마다하면 남편과 아내, 머리와 몸, 신랑과 신부, 그리스도와 교회는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 것이며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