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스승과 아비의 비유(고전 4:14-17)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의 복음은 "스승과 아비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사용한 비유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의 복음을 통해서 고린도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일만 스승처럼 많은 그런 스승으로서가 아닌, 결코 많지 아니하는 아비로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스승노릇보다는 아비노릇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야 한다는 메세지를 받게 됩니다.
옛말에 '군사부일체'란 말이 있습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다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시대에 뒤진 말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적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임금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스승과 아버지하고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스승이나 아버지는 그 제자나 자식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은 잘되는 신하나 백성을 반역자로 몰아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임금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가 잘 되면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들보다 낫기를 바라는 것이 아비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고생해서 자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자기보다 좀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승과 아비는 공통점이 있고 유사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스승과 아비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스승에게는 우리가 사상을 배우고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받았습니까?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지식을 받은 것이 귀합니까? 생명을 받은 것이 귀합니까?
물어보는게 이상한 것이지요? 생명을 받은 것이 귀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임금이 되기도 원치 않았지만 또한 단순한 지식을 가르쳐주는 선생으로 여겨지기도 원치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믿음의 아버지이기를 원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난산을 할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스승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교인들의 아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세가 스승의 자세로 머물러 있고, 자꾸만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권고하는 자세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만 스승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변화시키는 것은 아비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붙들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입니까? '아비'입니까?
교회에서는 스승이 아니라 아비가 되어야 합니다. 아비가 되어야만 비로소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스승'과 '아비'는 가르치는 것은 비슷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과의 연관성입니다.
아비는 희생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한 생명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고 합니다. 아비로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스승이 많아지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서로 가르칠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잘란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도 스승, 너도 스승. 스승끼리 모이면 싸웁니다. 그러나 아비가 모이면, 아비가 생겨나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본래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버지이시기도 하시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생명의 새로운 출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실재적으로 확연하게 연결시켜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닮은 꼴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닮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신앙으로 낳았다고 하면 당연히 그 신앙이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은 자 되라"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상을 닮고 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영화와 TV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불륜과 친자의 진위문제들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반드시 DNA가 같습니다. 유전자가 같습니다. 이 유전자가 닮은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딸 결혼식장에 가서 딸을 못알아봤다고 합니다. 얼마나 뜯어고쳐볐든지 말입니다. 아버지가 못알아볼 정도 뜯어고치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 신뢰와 존경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도 그렇고 스승과 제자도 원치 않으면 관계를 청산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은 생명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한 그 관계가 절대로 청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관계가 생명의 관계인줄 알고 이것이 끊어지면 생명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생과 구원의 관계가 끊어지는 줄 알고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스승노릇보다는 아비노릇을 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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