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인간과 인간과의 모순과 갈등 본문

송기현의 살림신학

인간과 인간과의 모순과 갈등

유앙겔리온 2013. 2. 7. 19:27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담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던 그 아내에게 자신의 죄의 책임을 전가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한 것이다. 돕는 배필이며 가장 가까운 동료인 부부간에 사랑과 용서와 덮어줌과 책임을 자기 스스로에게 지우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난 가인과 아벨이 서로 대립하고 원수시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닌가? 가족이란 공동체 자체는 연합과 조화이지 갈등과 투쟁의 모순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처음 가정부터 그렇지를 못했다. 가정을 기초 단위로 해서 우리 인류에게는 여러 공동체가 있어왔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대립과 대결을 일삼는 것들이었다. 공동체 자체가 이익을 위한 사회적 결사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 종족, 민족, 파벌, 당파, 정당, 계급, 종교와 종파들의 공동사회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할 수만 있으면 공동체라는 말을 이 연구의 글에서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이후로 인간은 서로 싸우며 서로 미워하고 살해하며 지내왔다. 죄의 소원을 가진 인간은 타인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죽이기까지도 한 것이다. 인간은 타인에 대하여 지배적이며 억압적이며 공격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는 사랑의 법칙보다는 내가 사느냐 네가 사느냐하는 경쟁의 법칙이 우선한다. 그래서 심지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가정 역시 대결과 대립과 미움과 추방의 역사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과 롯,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윗 왕가와 그 왕조사에서의 권력투쟁과 갈등은 예외 없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모순과 갈등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디를 보든지 싸움을 본다. 국가간, 동서간, 남북간, 종교간, 계층간, 인종간, 성별간, 심지어는 한가족 안에서 형제간, 부모자식간, 노소간, 한 어미의 태 안에서 쌍태간의 싸움과 전쟁을 보게 된다. 이러한 갈등과 모순관계는 복음서라고 예외는 아니다. 복음서를 관통하고 있는 문제도 갈등의 문제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 통치자들과 대중들과의 갈등, 당시의 제국주의적 억압자인 로마의 권력과 그것을 대항하는 억압당하는 유대민족과의 갈등, 주인과 종의 갈등,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갈등,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갈등, 정결하게 여겨지는 경계선 안에 있는 자들과 정결치 못하다고 판단되어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자들 사이의 갈등, 예수의 활동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 등등이 만연해 있었다. 결국은 이런 갈등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역사를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성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적대와 갈등은 인간의 비인간화(非人間化)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신적 대립을 신화적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20세기까지의 교회의 역사는 이와 같은 옛 역사를 반복하거나 답습하거나 윤회를 하는데 있다. 기독교의 역사가 옛 유대교의 역사를 그대로 추종한 것이며 도리어 그러한 역사를 강화한 면이 없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서로 대립하고 대결하고 대적을 하면서 내전을 하고 내분을 하며 성전(Holy War)까지 하였듯이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형제끼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하였듯이 기독교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30년 전쟁, 100년 전쟁은 물론 1차 대전과 2차 대전도 치룬 것이다. 보프(Boff)3,400년간의 기록된 인류의 역사 중에 3,166년간은 전쟁을 하였고, 나머지 234년은 전쟁을 준비하는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와 교회도 진리수호와 정통보수를 빙자하여 전투적이며 투쟁적인 기독교선교와 교회선교를 일관하였다. 심지어 교리나 주의를 놓고 원수가 아닌 형제까지 경계를 짓고 원수시하고 제거하고 처단하였다. 구속이 없어서 이와 같은 일이 계속된 것이 아닌 것이다. 구속을 수단으로 하는 구원관은 결국 지금까지 기독교회사가 걸어왔던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가 스스로 자작한 죽음이나 멸망의 위험이 성서에 언급된 죽음과 멸망의 위험 정도를 초월하는 지경에 와 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역사가 아니라 인간들이 독존(獨存)과 독생(獨生)을 바란 나머지 힘쓰고 애를 써서 자초한 역사이다. 인간이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결과인 것이다. 인류 멸망의 핵시계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와 있다. 핵전쟁이나 화학무기나 레이저무기 등으로 오는 멸망은 인류가 영원히 소생할 수 없는 영원한 멸망을 초래한다. 인류는 한때 자연을 물신처럼 여겨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있었으며 문제가 생기면 그 물신이 노여워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움의 존재가 인간 자신이란 것을 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자초한 문제이다. 사람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를 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하고 살면 되는 것을 사람이 그렇게 하지를 못해서 셀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교회가 이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든 피하게 해 주시겠지 하는 섣부른 믿음에 있다. 문제는 교회가 예수는 말하면서 예수가 하신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서로 사랑으로 오는 구원이었으며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으로 더욱 풍성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로 사랑으로 오는 구원을 본질로 하고 있는 기독교와 교회가 반전(反戰)이나 반핵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화해와 공존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오히려 근본주의(원리주의)의 종파적 특성을 강화하여 호전적이고 전투적인데 있으며 전쟁을 옹호하고 전쟁을 위해서 기도하기까지 한다. 이런 신앙은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격이다. 이것은 구원이 아닌 자멸의 가증한 전초인 것이다.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원리주의자들의 과격성과 테러리즘의 무자비성을 목격하면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도 정작 교회가 근본주의로 화석화(化石化)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 채하고 있는 것이다. 하바드대의 사뮤엘 헌팅 턴(Samuel Huntington)교수가 1996년에 낸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종교문명의 충돌로 오는 종말을 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원이 없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인류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객의 2원론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희망의 여지가 없다. 동서의 냉전 즉 미소의 냉전이 끝난 뒤 신냉전(New Cold War)의 전운이 깊게 드리워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각 개인별, 각 민족별, 각 국가별로 구현되는 그릇된 경쟁과 자유 행위는 상호간섭을 통해서, 상호조장과 영향을 통해서 엄청난 세력으로 등장하여 이 세계와 사회구조를 비구원적 상황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 인식은 인류로 하여금 지배가 아닌 공존,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 자본주의의 그늘을 뛰어 넘는 연대적인 가치관, 기계적 시장경쟁이 아닌 나눔의 공심체로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구속적인 구원관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인 서로 사랑으로라야 가능한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다행스러운 조짐을 목격하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카토릭교회의 행보이다. 교황은 지금까지 구속적인 구원론에서 저질러온 온갖 교회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를 하며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행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갔다기 보다는 어쩌면 거꾸로 인류에게 부딪친 문제에 접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드러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노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길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도와 같아서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다. 닫쳐진 것은 열어야 하고 다듬어지지 않는 것은 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나를 제어하고 나를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나의 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