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인간의 실존적 상태와 구원의 필요성 본문

송기현의 살림신학

인간의 실존적 상태와 구원의 필요성

유앙겔리온 2013. 2. 7. 19:20

  구원이나 구조는 어떤 속박이나 위험으로부터 해방과 건짐과 자유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인류에게 구원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구원론을 연구하는 출발점이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 제기가 포스트모던시대에 구원론을 연구하는 동기가 된다. 구원이 불필요하다면 구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구원함을 받아야할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이 성서의 출발점이며 복음 구원론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대체로 평온치 못하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지만 고통에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평화를 원하지만 끊임없는 분쟁과 싸움과 전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안정과 안전을 바라지만 계속되는 재해에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불시에 불구가 되기도 한다. 건강을 바라지만 병에 걸리기도 하고 끝내는 질병에 의해서 생명이 침몰 당하기도 한다. 인류의 죄성에 대한 문제와 같은 고전적인 주제는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인류의 최대의 난제인 기아(飢餓)의 문제, 질병(疾病)의 문제, 억압(抑壓)과 소외(疎外)의 문제, 전쟁(戰爭)의 문제, 새롭게 제기되는 환경(環境) 공해의 문제, 날로 늘어만 가는 청소년 범죄(犯罪)와 인간의 폭력성(暴力性)과 인간성의 상실 문제, 문명의 충돌의 문제는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실상에 있다. 이처럼 사람이란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가 위험이며 구원과 구조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존재임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가 경험하는 인간의 실존적(實存的)상황인 것이다. 일찍이 욥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탄식한바가 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3:25-26)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수작업으로 진행되던 작업장이 기계화되고 자동화됨으로써 인간은 단순작업의 노동자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항만과 도로, 항공로의 개척 그리고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나라와 민족이 지구촌의 한 거주인으로서 한 가족으로서의 연대의식을 느끼며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고 각 분야의 학문은 놀라울 만큼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비 문명지역으로 여겨졌던 대부분의 지역들도 유럽화 내지는 서구화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말미암은 해악(害惡)으로 인해서 위기상황이 감지되고 있다. 고도의 산업사회는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여 환경문제를 야기 시켰고 기계과학기술은 막대한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순식간에 가져올 수 있으며 인류가 가꾸어온 문화와 업적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위험을 상존케 하고 있으며 기계화로 인한 잉여인력은 실업의 문제가 되어 사회적 불안을 낳고 있어서 심각한 구원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 문명을 문명화시키는 것은 유럽화나 서구화가 그 해답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현상에 있다. 인류는 이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경탄에서 서서히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거스르고 있거나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 역행(逆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t Spengler)서구의 몰락에서 서구 문명의 몰락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음을 예견했다. 20세기말을 지나서 새 천년에 진입하고 있는 인류는 동서를 떠나 새벽의 희망보다는 지구의 황혼을 느낀다. 성장제일주의적 서구의 근대 산업문명의 온갖 폐해, 예컨대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차별, 빈부격차, 환경파괴에 따른 생태의 위기가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상황이다. 이 치명적인 상황은 구속적인 구원관으로는 해답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구원의 문제가 지금까지 종교적인 구속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류는 지금 깨닫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그의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구원의 문제에 해답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감추어지고 덮여지고 뒷전에 밀려나 있어서 소중히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제 난파가 임박한 것으로 보이는 지구호의 운명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 앞에서 신학은 책임을 느껴야 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 처방을 내려야하는 시점에 서 있다.

 

  서구국가들은 모두 기독교와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서구문명의 대명사처럼 생각하고 비판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서구 문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화의 모습이며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서구문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서구문명과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탈서구화, 탈유럽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무한한 복음이 빛을 발할 수가 있게 된다. 예수를 유대주의의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 초기교회의 큰 문제였던 것처럼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서구주의의 안경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주의로도 어떤 세대와 시대의 문화로도 가둘 수가 없으며 제한 해서도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이제 와서 서서히 인류가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인류가 새 천년을 맞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인간의 변화만이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고 있으며, 인간 스스로에게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과거에는 오직 종교적인 관심사로만 보았던 구원의 문제가 오늘날에는 정치적, 사회적, 인류의 전반적인 분야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구원의 필요성의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