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개와 돼지의 비유(마 7:6) 본문
오늘 저녁에 함게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개와 돼지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개와 돼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가장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와 돼지는 그 특성상 특별한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선호하고 그런대로 괜찮은 동물쯤으로 여기는 개, 돼지의 의미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개돼지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은 반려동물로서의 개와 돼지를 일컫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괜시리 시비거리를 만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를 든다면 기독교는 애완동물이나 반려동물을 혐오하는 집단이라든지, 예수님은 그것을 부추기는 분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시비거리를 좋아하고 어떻든 말도 안되는 논리로라도 복음을 폄하하려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분명히 밝히는 바이지만 개와 돼지의 유대적인 표현은 지금의 반려동물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고 오직 그 습성과 율법에 의해서 혐오스러운 의미만을 가진 동물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서 서는 개와 돼지는 불결한 그래서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먹을 수도 없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1. 먼저 개들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길들여진 개는 주인에게 충실하고 사랑받는 동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 개에게는 여러가지 못된 습성, 부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란 잘 길들여진 반려동물로서의 개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주인 없는 개, 길들여지지 않은 개, 야생의 개를 말합니다. 늑대개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개들은 이 골목 저 골목을 배회합니다. 윗 마을, 아랫 마을을 배회합니다. 개가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개는 탐욕으로 으르렁 거리며 물고 찢고 싸웁니다. 고기덩어리 하나를 놓고도 나눠 먹을 줄을 모릅니다. 혼자 통채로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며 싸웁니다. 심지어는 고기덩어리를 먹을 때는 어미와 새끼도 모릅니다. 오직 고기덩어리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개가 먹을 때는 건드리는게 아닙니다. 개는 사납고 잔인합니다. 토사견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개는 무척 사납고 잔인합니다. 한번 물으면 끝까지 놓지를 않습니다. 상대가 죽어야만 물었던 것을 놓습니다. 개란 또한 음란한 동물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동물 중에서 말은 자기 조상을 4대 까지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는 부모도 알아보지 못할 뿐만아니라 아무대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란한 짓을 합니다. 개는 시끄러운 동물입니다. 개는 낮선사람을 보면 짖어댑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밤하늘의 달을 보고도 괜히 짖어됍니다. 한 마리의 개가 짖기 시작하면 온 동네의 개가 다 짖습니다. 개는 그래서 시끄러운 동물입니다. 개는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한번 토하였다면 시원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버려야 할텐데, 개는 자기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들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성경에서나 예수님께서 개를 비유의 소재로 등장 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율법은 "창기의 번 돈과 개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장18절)고 하였습니다. 시 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利)만 도모하며"라고 했고, 또한 사도 바울은 "개들을 삼가라" 하였습니다.(빌3장2절). 개들을 삼가지 아니하면 신앙에 손해를 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 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장 15절). 하여 개 같은 자들은 구원 밖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돼지 의 특성을 살펴봅시다.
돼지는 한번에 새끼를 12마리 이상 낳을 수 있는 다산성 동물로서 사람들은 돼지꿈을 길운 내지는 다복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돼지 꿈을 꾸면 어디부터 달려갑니다. 복권사려고 달려 가거나 무슨 투자라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였습니다. 돼지에게는 특별한 부정적인 특성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돼지는 아무리 깨끗이 씼어놓아도 더러운 곳에 다시 눕습니다. 돼지는 먹기를 탐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일하지는 않습니다. 돼지는 애완용 동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처럼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살지워 도살하는 사육용 동물일뿐입니다. 돼지는 머리를 숙이고 코로서 땅을 후벼파며 먹이를 찾습니다. 돼지는 미련합니다. 옛날에는 돼지를 도살장에 끌고 가기 위해서 볶은 콩을 돼지 앞에 한알씩 떨어트렸습니다. 돼지는 머리를 땅에 쳐박고 코로 땅을 후비며 부지런히 떨어진 콩을 주워 먹으면서 도살장에 이르렀습니다. 돼지는 도살장 문앞에 와서야 사지로 왔다는 것을 알고 비로서 앞발을 버티며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러한 돼지의 특성은
성경이나 주님을 통해서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벧후 2:22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군대귀신 들려서 무덤 사이에 거하는 거라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귀신들이 예수께 구하기를 많은 돼지때에게 들어가기를 구하매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였셨습니다. 그러자 거라사인에게서 나온 귀신은 많은 돼지떼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비탈로 내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마8장28-34).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개와 돼지가 동격이고 거룩한 것과 진주가 동격입니다.
그런데 개와 돼지는 동물인 개와 돼지를 말씀하고 있지 않고 어떤 사람들을 향한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개들을 "몰각한 목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몰각'이란 깨우침에서 떨어졌다는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개는 말씀의 깨우침에서 떨어진자 즉 거짓목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 자기길로 돌이키며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가지않고 자기길을 가는 자이니까 거짓목자이지요. 그리고 돼지는 혼합주의입니다. 돼지는 밥과 똥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속주의 자들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입으로 삼키기를 좋아합니다. 사두개인들의 기질과 같이 타협의 명수입니다.
개와 돼지와 같은 사람을 칼빈은 "하나님을 고의로 모욕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개와 돼지'는 사람이지만 개와 돼지의 본성을 가지고 개 돼지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개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고 또한 돼지처럼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개와 돼지처럼 살아서는 아니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척 보고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중에 개돼지에게 당하고서야 아! 그 개와 그 돼지에게 내가 당했구나 하고 탄식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 역시 개돼지에게 줄 수 없는 것과 같이 개돼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줘서는 안되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거룩한 것 곧 진주"는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입니다. 하나님나라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했으므로 거룩한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복음을 전해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개같이 찢어버리고, 돼지 같이 짓밟아 버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주님 당시 대표적인 두 그룹을 소개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무리들이 이와 유사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복음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룩것과 진주를 왜 개와 돼지에게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하셨습니다.
단순히 귀하고 값진 것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찢어 상하게 하는' 행위는 그것을 주는 이들에게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귀한 것을 주었는데 그 귀한 것이 배설물처럼 발에 밟히고, 도리어 준 사람을 손을 물어 뜯고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는 죽이는 일까지 할 것이란 경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뭐었이든지 알아보는 자에게 주어야 귀히 여김을 받고 그것을 은혜로 알고 고마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비유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개들과 같고 돼지들과 같은 이들도 이와 같이 주의하라고 하셨다면, 그렇다면 개 돼지 만도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은데 개와 돼지만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귀한 것을 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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