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티와 들보의 비유(마 7:3~5) 본문
'2중 잣대'란 말이 있습니다. 이중잣대란 어떤 대상을 두개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을 일컽는 말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기준으로 대하고, 다른 한 쪽 사람에게는 관대한 기준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가끔 공정해야할 스포즈경기를 관람하면서 공정치 못한 심판의 판정을 보면서 분통을 터트릴 때가 있습니다. 심판이 중립에서서 정확하게 사실대로 심판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고 어느 한 편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어느 한 편에서 대해서 편견을 가기고 봐주고 편들고 해서 경기를 공정하게 이끌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기에서 내용으로는 이기고도 결과로는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허탈해집니다.
이중 잣대는 인간의 심리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심리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욕심과 탐욕에서 연류한 것입니다. 고기를 파는 사람과 고기를 사는 사람, 곡식을 구입하려는 사람과 곡식을 매매하려는 사람은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저울추나 되나 말을 사용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중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과 되와 말을 속이는 것에 대해서 염격하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땅을 소유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땅의 지계표와 경계표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죄를 엄격하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심리중에는 자신의 허물과 약점과 실수에 대해서는 최소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자세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과 약점, 실수에 대해서는 아주 극대화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와를 탓"했습니다. 사실은 비난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피보다는 물보다 진한 그래서 물쪽보다는 피쪽을 더 편들게 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면서 자신과 제식구 감싸기를 합니다.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약간씩은 정으로 보아줄수도 이고 그 정도는 각오를 합니다.
자기의 바운다리에서 싸우면 유리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주고라고 상대를 자기가 사는 곳으로 불러 들어서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이중 잣대 중에서도 너무 그 차이가 커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중 잣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도저히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데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2개의 잣대 중에 하나는 "티"고 다른 하나는 "들보"입니다. 티와 들보의 차이는 너무 커서 눈먼 봉사라도 그 크기의 차이를 구별하는데 실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은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들보를 생각해 봅시다. 들보란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길고 큰 재목을 말하고, 티는 들보에서 어쩌다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이나 먼지를 말합니다.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차이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나무라고 꾸중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티와 들보의 비유는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무비판적이요,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처리할 때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해서 취사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분별력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배운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선한 양심에 따라 결단해서 살아가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분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영인지 육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병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심판이 경기의 눌을 몰라서 정확한 눌을 적용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분별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사적인지 무엇이 공적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심판자적 입장에서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정죄하고 비난하게 되면 그것으로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그 비판, 그 정죄와 비난이 다시 돌아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예수님은 너희가 하는 그 비판의 잣대로 너희가 도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런 정죄와 비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판이 난무하게 될 때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공동체는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비판을 꼭 해야겠다면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잘 보지만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 단점, 허물은 잘 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작은 티에 비해 본인은 아예 들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들보는 대들보로 엄청 큰 것입니다. 자신은 이런 엄청난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본인만 못보고 모릅니다. 남들은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신의 이런 큰 허물과 약점이 안 보이고 남의 작은 티만 예리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의 들보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치명적인 들보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 보는데 자신만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들보가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들보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여 나의 들보를 찾아내야 합니다.
자신의 큰 들보를 가진 사람은 어떤 자격이 없습니까?
4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큰 들보를 가진 사람은 남의 티를 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먼저 비판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비판을 잘하는 사람이 외식하는 자입니까? 바리새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처형하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여자는 사회에서 없애야 한다고 정죄하고 심판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예리한 율법의 잣대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정말 간음도 하지 않았고,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백성들의 눈을 피해 죄를 지었습니다. 간음도 했고, 더 나쁜 짓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죄를 더 감추려고 더욱 백성들을 조였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악 되고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만 안 그런 척, 모든 죄악을 초월한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하게 죄악 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을 향하여 난 큰 들보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남을 비판하려거든 어떻게 하고 비판을 해야 합니까?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십니다. 나의 큰 들보를 빼 낸 후에 그리고 밝히 보고 남의 티를 빼라는 것입니다.
결국 비판은 병입니다. 비판은 악순환만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주셨는데, 이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비판문제를 종식시킬 것은 사랑입니다. 감싸는 사랑, 덮는 사랑입니다. 비판은 비판만 일어날 뿐입니다. 이런 비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형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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