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새끼를 모으는 암닭의 비유(마 23:37~39)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새끼를 모으는 암닭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새끼를 모으듯이 그 날개 아래 우리를 늘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등장하는 닭이란 동물은 인간과 함께 한 꽤 오래된 동물들 중에 하나입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나 욥기에도 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새끼를 모으는 암닭의 비유, 종말사건에 언급한 닭이 울 때라든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등을 살펴보면 예수님시대에는 이미 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중화된 동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사용할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소수만 알고 있는 것을 소재로 삼지 않으시고 널리 알려진 것을 사용하시는 특징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암닭과 병아리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든지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집안에서 짐승을 키워보면 유난히 그 새끼를 사랑하는 동물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암탉은 정말로 새끼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높은 나무 꼭데기에 집을 짓고 달갈을 낳은 암닭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암닭이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나무꼭데기까지 날아올라가서 달갈을 낳게 된 것은 땅에다 달갈을 낳으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 전문가의 해석을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새끼를 모으는 암탉"의 비유는 이처럼 새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암닭을 모델로 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과 그 분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고 있는 주님 자신의 모습과 주님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주고 있는 그런 비유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푸근히 감싸시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어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고 창세기 1:2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병아리와 같은 연약한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병아리는 연약한 동물입니다. 병아리는 집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집안에서 조심스럽게 키워도 100%다 큰 닭으로 키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병아리는 병들어 죽고 어떤 병아리는 짐승들에게 물려 죽고, 이래 저래 죽고 나머지 몇마리를 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이야 어려가지 기술이 개발되고 먹이와 약들, 시설이 갖추어져서 생존율을 높이고 있지만 옛날에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도 부족한데 큰 가치가 없는 병아리를 위해서 대단한 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연으로 한 번 눈길을 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거북이 떼 같은 것은 바다가 모래 밭에 엄청난 양의 알을 낳아 놓습니다. 그리고 낳은 알에서 새끼들은 셀수도 없이 부화되지만 바다물로 들가는 중에 죽고 바다에 들어가서도 자라기까지 큰 고기들의 밥이 되고 정작 어미 거북이로는 몇마리 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병아리가 그렇습니다. 너무 연약해서 어미닭이 될려면 이래저래 많은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자기의 주제를 알고 조심을 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병아리는 이것 저것 가리지를 않고 덤벼들기도 하고 제 마음대로 이리저리로 종종거리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독수리나 만나고 매나 만나고 족제비나 만나면 영락없이 그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함정에라도 빠지면 결국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자라지 않아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다리도 짧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미닭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속이 터지지만 이 병아리가 그 어미 속을 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미닭은 계속해서 꼬, 꼬, 꼬하고 병아리에게 주의를 주고 병아리를 모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미닭과 병아리의 모습이 마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고 방종하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종종거리고 다녔습니다.
암탉은 그 병아리를 모으려고 하는 행동을 끝없이 합니다. 지칠만도 한데 어미닭은 절대로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병아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 날개 아래 모으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주님은 하나님 사랑이 인내하는 사랑임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참아주셨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아주시지 않았다고하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길이 길이 참아주시니까 인간의 오만함과 교만함과 하나님을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결코 무능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암탉은 결국 위험이 닥칠 때면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병아리를 결사적으로 보호합니다. 옛날에 어떤 시골집에 불이 났는데 나중에 불을 끄고 헛간을 살펴보니까 암탉이 새까맣게 타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로 차보았더니 그 품속에 병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몸으로 병아리들을 보호한 그 암탉의 새끼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좌를 희생하셨습니다.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권세와 영광과 힘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희생적인 사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암탉이 이만한 큰 사랑으로 병아리들을 사랑하고 귀히여기지만 병아리들이 거절 하고 그 어미의 품에서 자꾸만 멀어지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이나 은혜나 은총이나 은사나 신령한 모든 것은 인간이 거절하기로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원치 아니하면, 인간이 그것에 대하여 응답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열대 지방에 가보면, 더위와 볕이 얼마나 심하게 사람을 쬐이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형제는 열대에 사는 사람이 양산을 잊고 안 가지고 나갔다가 돌아온 후, 수 개월 동안 앓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은 세 사람이 함께 어떤 지방에 갔다가, 한 사람만 살아서 돌아오고 남은 두 사람은 도중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덮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덮은 것이 없으면 더위로 상하게 된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그늘 아래" 라는 덮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을 때 생명이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시편 36 : 7 - 9).
예수님의 날개 아래는 구원이 있고, 사랑이 있고, 비젼이 있고, 진실이 있습니다.
병아리는 암닭의 날개 아래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감추인 생명인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병아리는 병아리일 뿐입니다. 병아리가 암닭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암닭의 날개를 가진 그런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병아리는 언젠가 자라서 암닭이 되어야 합니다.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을 암닭의 역할을 할 그런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암닭이 병아리를 따뜻하게 품듯이 품을 수 있는 암닭의 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암닭의 날개 아래는 포근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안전하고 따뜻하고 온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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