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하루살이와 약대의 비유(마 23:23~24) 본문

비유의 복음

하루살이와 약대의 비유(마 23:23~24)

유앙겔리온 2011. 9. 17. 09:48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하루살이와 약대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를 책망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자했던 율법주의 신봉자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그 율법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는 커녕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이나 가르침은 별로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그 말씀을 지키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주의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떤 사람이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뭐든지 말로 다해버리고 정작 책임져야 할 일들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말에 책임을 지고, 혹 말은 없어도 묵묵히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은 구약의 정결법에 따라서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분명하게 구별하였습니다. 정결한 음식은 먹어도 되었지만 정결하지 아니한 음식은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루살이나 약대는 먹어서는 안될 부정한 음식에 속한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특징적인 것은 극과 극의 대비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살이와 낙타' 
  하루살이는 날아다니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동물 중에서 가장작은 것이며, 약대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제일 쉽게 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동물입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조심스레 걸러내고 약대는 통체로 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선자들은 하루살이 같이 작은 죄는 안지으려고 까다롭게 따지고 들면서 약대와 같이 큰 것은 그대로 집어삼키는 것과 같이 큰 죄는 겁도없이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비등비등해서 반가름이 나지 않아서 헷갈릴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해서 누구라도 오해의 소지나 자신의 무지를 탓해서 비껴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의 유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에 하루살이와 약대는 각각 갈마(galma)와 감나(gamla)로 발음 됩니다. 이는 일종의 말 비틀기에 속한 유머입니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극과 극입니다. 목구멍으로 하루살이가 쉽게 넘어가지 어찌 낙타가 먹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그것은 조크이며 유며이며 웃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비유에서 언급되는 일이 실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하여지고 있는 사실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 대신 포도주를 많이 먹습니다. 그 당시에는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다 넣고 먹습니다. 가죽 부대를 그냥 두면 하루살이가 들어와서 빠지는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이것을 헝겁이나 채에다 받혀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먹었습니다. 그냥 먹으면 하루살이를 먹을까 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율법적으로하면 하루살이도 부정한 것이고 약대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다 먹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날개가 있고 기어다는 발이 있는 곤충은 가증한 것이라서 먹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물 중에서 굽이 안 갈라진 약대를 먹지 말라고 말씀 합니다. 약대도 부정한 것이고 하루살이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먹었습니다. 바리세인들이 실제로 하는 그 행위를 비유해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말씀 하신 것입니다. 작은 것은 걸러내고 큰 것은 먹는 다는 말씀입니다 .

 

  오늘 이 말씀은 둘 다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대도 먹어서는 안되고 하루살이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라도 꼭 먹을 수 밖에 없는 경우라도 또는 실수로 먹게 되는 일이 생기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루살이라면 이해되겠는데 반대로 약대는 꿀꺽하고 삼키면서 하루살이는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라고 소란을 떨고 걸러내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23절에 보는 바와 같이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에 "의와신과 거룩"을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씨를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신 14:22∼2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것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 관계에서 중요시되어야할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문제시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행위를 하루살이와 약대에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바리새인들이 목숨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것이고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의와 신과 거룩은 약대와 같은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은 바로하겠다고 날리를 치면서 정작 큰 것은 소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 적인 것은 똑바로 하지 아니하면서 그렇지 않는 것에는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도 어기면서 인간이 만든 법이나 유전은 어기면 안된다고 야단을 칩니다.  바로 이런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 본문 말씀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포도주를 마실 때 종교적 이유로 하루살이 때문에 포도주가 더럽혀지지 않게하기 위해 천으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곤 하면서도, 그것 보다 종교적으로 더불결한 짐승인 낙타는 삼킨다고 풍자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종교 생활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않은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가면서 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인 정의·자비·신의는소홀히 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인된 인도자들이라고꾸짖었습니다.
하루살이와 낙타의 비유는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대충대충 해온 우리의 습관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누구 말대로 '부전공을 전공하는(majoring in minors)' 우(愚)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그것에 대해 경고하신 이유는 그들의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 때문이었습니다. 형식주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형식주의 신앙은 사람을 진실된 신앙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리스말에 `위선자'라는말은 광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이것은 말과 속셈이 다른 사람을말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 내면은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식주의 신앙은 신앙의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제도를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쳤을때 그 자리에 있던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제쳐놓고 제도나 규정에 넋을 잃은 무리에 대해 격렬한 노여움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제도나 규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입니다. 

 

  교회나 성도들이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다음으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가야합니다. 부단한 자기 갱신을 통해서 자유하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형식주의의 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그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럼 그것은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