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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생선의 비유(마 7:7~11) 본문

비유의 복음

빵과 생선의 비유(마 7:7~11)

유앙겔리온 2012. 1. 12. 18:52

   인간은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고 현재 역시 진행형입니다. 인간이면 아무리 부한 자도 가난한자도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도,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싶을 만큼 많이 가진자도 역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존재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반드시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도록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이 비유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라든지, 돌과 뱀의 비유라 해도 되겠지만 저는 이 비유를 "빵과 생선의 비유"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빵과 생선 그리고 돌과 뱀,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하셔도 꼭 이렇게 비유를 하십니다. 빵(떡)과 생선은 유대인들의 기본 식량입니다. 그러나 돌과 뱀은 식량으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1. 빵을 돌과 연관시킨 이유
  빵과 돌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방식은 아니고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방식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 4:3에서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했습니다. 아마도 빵과 돌의 생김새가 비슷한데서 둘을 한데 묶는 방식이 유래되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빵과 돌은 비슷한 모양이라고 해서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며 오히려 확연하게 상반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자식에게 빵은 유익한 것이지만 돌은 무익한 것입니다.

 

  2. 생선과 뱀을 연결하는 지혜
  생선과 뱀을 연결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선 중에 뱀장어는 뱀과 비슷하게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 뱀장어는 안디옥의 호수에서 많이 잡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뱀장어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생선입니다. 레 11:10∼12에서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했습니다.

 

  3. 누가복음의 병행구에는 빵-돌의 비유가 없는 대신 알-전갈의 비유가 나옵니다.
  눅 11:11∼12에는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했습니다.
  전갈은 독이 있어 생명을 위협합니다
  배고픈 자식에게 생선이나 알은 유익한 것이지만 뱀이나 전갈은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4. 오늘 비유에서 등장하는 배고픈 아이
  배가 고픈, 꼭 배가 고프지는 않더라도 때가 되어서 자식이 빵과 생선을 구합니다. 이 자식이 꼭 어린 자식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자식은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젖을 달라하지 빵과 생선을 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장성한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며 부자지간의 정을 인정하고 서로 의존하면서 사는 관계에 있는 자식임이 분명합니다.

 

  5.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
  그렇다면 사람의 탈을 쓰고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의존하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자식의 배고픔을 나몰라라 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다움, 사람다움의 증명은 자식이 대단한 외제차나 큰 집, 무슨 진귀한 보석도 아닌 배고 고파서 혹은 식사 때가 되어서 빵과 생선을 구하는 것인데 적절한 응답을 하는 것이 아버지다움의 증명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고문하는 전문적인 고문관도,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도, 남에게 사기나 치고 해나 입히는 그런 사람들도,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들도, 자신의 자식에게만큼은 인자하고 다정한 아버지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빵과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식에게 돌과 뱀을 집어 던져주는 아버지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수준의 아버지입니다. 패륜적인 아버지입니다. 제 정신을 잃어버린 병적 상태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자식을 유기하고 학대하며 죽이기 까지 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악한 아버지 수준 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이 세상에 있기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조리한 인간 세계의 나쁜 경험들이 우리의 정서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냉소와 허무와 회의와 무관심에 빠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뚤어진 정서이지 건강한 정서는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자식이 "요긴한 것"을 구하는데 어느 부모가 "위험한 것"을 주겠느냐는 것인데 반하여, 마태복음에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식에게 먹지도 못할 "불필요한 것"을 줄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듣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내용이므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오히려 해로운 것을 줄 부모가 없음을 밝히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6. 아버지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악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부족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잘못 생각할 수 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 7:11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물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자지간이라는 인간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고 진한 사랑의 관계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아나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자녀들인 관계로 나아갑니다.
  악인과 선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골골루 주시는 분(마 5:45)이시며 전능하실뿐만 아니라 전지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진정으로 빵과 생선을 구하는 자에게 돌과 뱀을 주실 이유가 없다는 비유입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주신 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사 49:15에 보면 바벨론 유배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스러운 한숨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잊으셨는가"라고 물을 때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단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산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하고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서의 제언이고 성서의 전공법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제언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인생 전공법입니다. 희망없다 하지 말아라. 괜히 냉소적이 되고 회의적인 인간이 되지 말아라. 나쁜 아버지도 패륜적인 아버지도 제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고 산모는 그 태에서 난 아들을 혹시 잊는 일이 발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아니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살아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