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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하는 여인의 비유(요한복음 16:16~22) 본문

비유의 복음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요한복음 16:16~22)

유앙겔리온 2011. 6. 15. 21:52

  오늘 우리가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해산을 앞둔 여인은 여러가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담력이 센 여자라고 할지라도 해산날이 가까워지면 온갖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이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아기를 낳다가 혹시 자신이나 아기가 죽지나 않을는지? 아기는 정상인지? 아기가 나오다가 잘못하여 다치지는 않을는지? 아들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딸이면 어떻게 하나? 등 온갖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해산의 과정에서 받는 아픔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입니다. 때문에 해산할 때에 고통이 시작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고 울며 불며 야단을 칩니다. 실로 이 해산에는 산모나 아기의 건강과 생명에 위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산의 때가 가까우면 산모는 물론 모든 가족이 다 긴장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진통이 오면 병원으로 달려가면 되겠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병원분만이란 것은 없었을 것이고 자연분만이 전부라서 아기를 낳다가 잘못되는 경우도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해산의 근심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는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는 생명을 낳기 위한 예고로서의 진통입니다. 잠깐만 있으면 자기의 분신인 아기를 낳게 되기 때문에 이 해산의 고통은, 해산의 수고는 할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통도 그렇습니다. 조금 있으면 고통에 대한 충분하고 분명한 하늘의 보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시며 "조금" "조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잠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잠깜 살다가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해산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들이 기쁨을 누릴 때 자신은 그 기쁨을 누릴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있을 해산의 수고는
짧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는 길어야 9시간 그렇지 않으면 서너시간이 끝이 나는 수고이며 고통인 것입니다.
  수고가 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지 않는 생각들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좋지 않는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년도 잠깐 지나갔고, 지난날의 내 일생의 나날은 물론 그 동안의 기쁨도, 슬픔도, 영화도 모두가 다 잠깐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고생이나 아픔도 모두가 다 잠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들도 잠깐이라는 생각으로 견디면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 지날 갈 일들입니다.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재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견디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산의 수고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는 일생도안 계속되는 수고나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는 아기를 낳을 때 잠깐 동안 있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가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1절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해산할 때 겪는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일단 아기가 출생하게 되면 모두가 다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복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산모가 해산할 때에 제 아무리 큰 고통과 아픔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은 사라지고 자녀를 갖게 된 어머니는 그 동안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근심을 위한 근심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 해산을 위한 근심은 기쁨을 가져오는 근심이었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기쁨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냥 잠깐 지나가고 끝나는 고통이 아니라 이 고통이 있으면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통하여 자기의 십자가의 굴욕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잠깐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 후 사람난 기쁨으로 인하여서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해산의 고통으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면 그로 인하여서 헤어릴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같은 십자가를 달게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통하여 잠시 고난을 받게 되겠으나 그것을 잘 견디고 참고 끝까지 이기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뿐이면 믿음이로 인한 고통이나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하는 기간과 같습니다. 이 진통의 기간이 끝나면 사람 난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할 순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와 고통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해산하는 여인의 수고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내 속에 이미 잉태된 아기를 해산하는 데도 그토록 힘들어서 죽느냐, 사느냐를 생각하고 온갖 수고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하물며 사단의 수중에서 저주와 멸망 아래 처해 있는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낸다고 하는 것은 그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해산의  수고를 치루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실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주님 사랑 안에서 자라가기 위해 서는 값을 치뤄야 합니다.(엡4;13-16)
 시간의 값을 치르자. (엡5;16)
 고통의 값을 치르자. (고후5;17, 롬8;17-18)
 시험의 값을 치르자. (벧전4;12)
 물질의 값을 치르자. (마6;19-21, 고후9;6-7)
 습관의 값을 치르자. (고후5;17)

  우리는 이 잠깐 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