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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가복음 4:26~29) 본문

비유의 복음

스스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가복음 4:26~29)

유앙겔리온 2011. 7. 13. 13:17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독특한 비유입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인데 불구하고 놀라웁게도 마가복음에만 이 비유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만 그 강조 점에 있어서는 약간 다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이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 운동을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가 "복음 사역이 당면한 저항과 장애들"(불신, 박해, 세속적 유혹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비유는 "땅에 심은 씨가 스스로 성장해가는 신비한 생명력과 성장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씨앗은 스스로 자라는 능력이 씨앗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은 자기를 땅에 뿌려주는 또다른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람이든지, 새든지, 아니면 농부이든지 씨를 땅에 뿌려줄 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농부가 땅을 갈아엎고, 잡초를 제거하며, 거름을 주는 일과 같은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농부는 씨를 뿌린 후에 그 씨앗이 자라서 결실을 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농부는 씨앗을 심은 후에도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농부의 수고가 아니라,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의 신비한 생명력입니다.

 

  주님은 "농부가 자고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농부가 땅에 뿌린 씨앗이 자라나되, 농부는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의 모습에는 무심함이 묻어나옵니다. 사실 좋은 농부는 씨앗의 생명력을 믿고 무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곽탁타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 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습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습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입니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입니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핍니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 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본성을 차츰 잃게 되고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순간부터 그 씨앗의 모든 성장과 결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지나친 간섭과 잔소리가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심하리만큼 그 성장의 힘을 믿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나 설교자들에게 주시는 비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들의 감각이나 생각으로는 아무런 생명의 움직임을 볼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씨앗 스스로가 생명의 능력을 발동해서 자라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씨앗 속에 생명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고 전도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아무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씨앗과 같은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이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한다는 것은 곧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결국 씨앗은 씨앗 그대로 있게 되고 새로운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그 씨앗으로 하여금 새로운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복음을 위하여서도 기회를 제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땅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그 어떻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수고만 하면되는 것입니다.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변화나 성장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해야할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부지런히 사랑을 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듣고 부지런히 믿음의 생활을 하는 수고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주시고 성장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지나치게 자라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스스로 자라는 것보다는 그 자라는 것에 인간이 직접 관여하게 될 때 편법을 쓰게 되고 그것은 결국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말 것입니다.

  씨앗 안에는 스스로 자라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뿌리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잘 자라도록 배려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오는 것처럼 처음부터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씨는 성장 단계가 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충실한 곡식이라"한 것입니다. 하나의 작은 생명에도 과정이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 있으므로 너무 조급하게 좋은 결과를 바라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과정을 참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열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정이 긴 것도 있고 과정이 짧은 것도 있으나 반드시 뿌리고 싹이나고 이삭이 나오고 충실한 열매가 되는 과정은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급하다고 과정을 무시하다보면 결국은 충실한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급성장하지 않고, 우리교회가 빨리 부흥 성장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온전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첫술에 배 부르지 않습니다. 꾸준해야 합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과 함께 임하고 말씀과 함께 자랍니다. 성도는 말씀을 공부하고 사랑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전파로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장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을 이루는 겨자씨와 같은 생명공동체, 믿음공동체입니다. 100여 년밖에 안 되는 기독교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이토록 크게 발전한 것은 세계적으로 불가사이한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씨뿌리는 행위에는 추수할 때를 기약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곡식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곡식이 익게 되면 지체하지 않고 곡식을 추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 부지런히 일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에 주님은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곡식이 익으면 농부가 지체하지 않고 추수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즉시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추수로 비유되곤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된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은 곡식이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주십니다. 이것은 농부가 가을이 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곡식이 익으면 농부가 추수를 지체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을 믿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고, 복음을 거부한 사람은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뿌려진 한알의 씨앗과도 같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언젠가는 추수 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충실한 이삭이 되어서 추수에 참여할 수 있는 인생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